하루 40알짜리 약을 1알로… 아나그램, 블랙스톤으로부터 2억5천만 달러 투자 유치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 CF)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온몸의 분비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희귀 유전질환이다. 폐에서는 끈적한 점액이 쌓여 숨쉬기 어려워지고 세균 감염이 잦아진다. 췌장에서는 소화효소가 분비 통로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막혀 버린다. 결과적으로 췌장이 분비해야 할 지방·단백질·탄수화물 분해 효소가 소장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음식을 먹어도 영양분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를 외분비 췌장 기능부전(Exocrine Pancreatic Insufficiency, EPI)이라 부른다.

anagram therapeutics - 와우테일

낭포성 섬유증 환자의 약 85%가 EPI를 동반한다. 먹은 음식이 소화되지 않으니 만성 설사와 복부팽만이 따라오고, 지방이 흡수되지 않아 심각한 영양 결핍과 성장 장애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표준 치료는 하나뿐이다. 돼지 췌장에서 추출한 효소를 알약 형태로 만든 췌장효소 대체요법(Pancreatic Enzyme Replacement Therapy, PERT)이다. 문제는 이 약을 식사 때마다, 하루 최대 40알씩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아나그램 테라퓨틱스(Anagram Therapeutics)는 이 숫자를 ‘식사당 1알’로 바꾸겠다는 목표로 설립된 회사다. 블랙스톤 라이프 사이언시스(Blackstone Life Sciences, BXLS)가 이 도전에 2억5천만 달러를 투자했다.

35년 CF 전문가가 다시 창업에 나선 이유

아나그램은 낭포성 섬유증과 희귀질환 분야에서 35년 이상 경력을 쌓은 연쇄 창업가 로버트 갈로토(Robert Gallotto)가 공동 창업했다. 그가 이전에 만든 회사인 알크레스타 테라퓨틱스(Alcresta Therapeutics)도 비슷한 문제를 다뤘다. CF 환자의 소화를 돕는 의료기기 RELiZORB를 개발해 시장에 내놨고, 이 제품은 2016년 의료기기 디자인 우수상(Medical Device Design Excellence Gold Medal Award)을 받았다. 알레나 파마슈티컬스(Allena Pharmaceuticals) 공동 창업에도 참여했고, 알나라 파마슈티컬스(Alnara Pharmaceuticals) 최고사업책임자(CBO)로 재직하다 회사가 일라이 릴리(Eli Lilly)에 인수되기도 했다. 바이오젠(Biogen), 세로노(Serono) 등을 거치며 영업·마케팅·사업개발 전반을 두루 경험했다.

그가 2023년 아나그램을 창업한 건 기존 PERT 치료제의 한계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였다. 돼지 췌장 추출 효소제는 위산에 분해되지 않도록 두꺼운 플라스틱 코팅을 씌워야 하는데, 이게 알약 크기를 키우고 복용 수를 늘린다.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돼지 유래 원료의 공급 부족이 반복돼 환자들이 약을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도 생긴다.

돼지 없이, 위산에도 안 녹이는 재조합 효소

아나그램의 핵심 기술은 돼지가 아닌 재조합 단백질로 소화효소를 만드는 것이다. 리드 파이프라인 ANG003은 지방 분해용 라이페이스(lipase), 단백질 분해용 프로테아제(protease), 탄수화물 분해용 아밀라아제(amylase) 세 가지를 하나의 알약에 담았다. 기술적 핵심은 위의 산성 환경(낮은 pH)에서도 안정적으로 버티다가 소장에 도달한 뒤 즉시 활성화되도록 분자 수준에서 설계했다는 점이다. 기존 돼지 유래 PERT가 두꺼운 코팅 없이는 위에서 녹아버리는 구조적 문제를 원천에서 해결한 접근이다.

아나그램은 EPI 치료제 중 최초의 비(非)돼지 유래 재조합 효소 제품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강조한다. CF 환자 중 일부는 종교적 이유나 식이 제한으로 돼지 유래 제품을 꺼린다. 이 환자군에게는 선택지 자체가 생기는 셈이다.

1상 통과, 2상은 크레온과 직접 비교

ANG003은 이미 CF 관련 EPI 성인 환자를 대상으로 1상 임상을 완료했다. 4가지 용량 조합의 안전성과 효과를 확인한 결과는 낭포성 섬유증 저널(Journal of Cystic Fibrosis)에 게재됐다. 현재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제 다기관 2상 임상을 개시한 상태다. 2상에서는 두 가지 용량 수준에서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현재 표준 치료제인 크레온(Creon, 애브비 제품)과 직접 비교한다.

이번 2억5천만 달러 투자는 2상 임상 완료, 규제 승인, 출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커버하는 데 쓰인다. 블랙스톤의 투자에 앞서 낭포성 섬유증 재단(Cystic Fibrosis Foundation)이 ANG003 초기 임상·개발을 위해 3천만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블랙스톤 라이프 사이언시스 글로벌 대표 니콜라스 갈라카토스(Nicholas Galakatos) 박사는 아나그램이 췌장 기능부전 치료를 근본적으로 바꿀 좋은 위치에 있다고 평가하며, 대규모 자본과 전문성으로 미충족 의료 수요를 해결하는 방식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밝혔다. 시니어 매니징 디렉터 키란 레디(Kiran Reddy) 박사는 ANG003이 치료 부담을 크게 줄이면서 임상 효과도 개선할 잠재력을 가진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평했다.

공급 불안·복약 부담 모두 해결해야 하는 연간 20억 달러 시장

현재 EPI 치료 시장은 크레온(애브비), 젠펩(Viatris), 팬크레아제(Digestive Care) 등 돼지 유래 PERT 제품들이 장악하고 있다. 미국 시장만 연간 약 20억 달러 규모다. 하지만 공급 부족 문제는 고질적이고, 수십 알을 먹어야 하는 복약 부담도 환자 삶의 질을 갉아먹는다. 재조합·미생물 유래 효소 제품들의 성장세가 가파른 이유다.

아나그램이 ANG003으로 크레온 대비 비열등성(non-inferiority)을 2상에서 입증하면 본격적인 시장 진입 논의가 시작된다. 낭포성 섬유증뿐 아니라 췌장암, 만성 췌장염 등으로 EPI가 생기는 환자군까지 포함하면 잠재 시장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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