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AI 스타트업의 ‘매출 착시’… ARR 부풀리기가 판치는 이유


AI 스타트업 붐이 한창인 실리콘밸리에서 불편한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연간 반복 매출(ARR)이라는 숫자가 실제 현금 흐름과 동떨어진 허상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ARR Bubble - 와우테일

지난달 법률 AI 스타트업 스펠북(Spellbook)의 공동창업자 겸 CEO 스콧 스티븐슨(Scott Stevenson)이 X(구 트위터)에 올린 글이 업계를 뒤흔들었다. 그는 “많은 AI 스타트업이 매출 기록을 깨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부정직한 지표를 쓰고 있다”며 “세계 최대 펀드들이 이 관행을 지지하고 언론에 오보를 흘린다”고 비판했다.

ARR 뒤에 숨은 CARR의 함정

문제의 핵심은 두 가지 ARR의 혼용이다. 일반적인 ARR은 ‘연간 반복 매출(Annual Recurring Revenue)’로, 이미 결제가 완료됐거나 이행 중인 계약의 연간 매출을 뜻한다. 반면 CARR은 ‘약정 연간 반복 매출(Committed Annual Recurring Revenue)’로, 계약은 체결됐지만 아직 제품 도입이 완료되지 않은 매출까지 포함한다. 문제는 많은 스타트업이 CARR을 그냥 ARR이라고 부르는 관행이다.

한 VC는 테크크런치에 “CARR이 ARR보다 70% 높은 회사도 봤다”며 “그 약정 매출 중 상당 부분은 실제로 실현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도입 기간이 길어지거나 파일럿 단계에서 고객이 이탈하면 계약 금액 전부가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 유명 엔터프라이즈 스타트업은 1억 달러 ARR 돌파를 발표했지만, 그중 현재 결제 중인 고객에서 나온 매출은 일부에 불과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직 배포조차 되지 않은 계약분이었다. 또 다른 스타트업은 1년짜리 무료 파일럿조차 ARR에 산입했고, 대형 VC가 참여한 이사회도 이 사실을 알면서 묵인했다고 전직 직원이 전했다.

또 다른 ARR: 연환산 런레이트의 유혹

같은 ARR 약자를 쓰지만 전혀 다른 개념도 혼용되고 있다. ‘연환산 런레이트 매출(Annualized Run-rate Revenue)’이다. 이는 특정 기간(분기, 월, 심지어 하루)의 매출을 12개월로 외삽해 추정하는 방식이다. 사용량·성과 기반 과금이 일반화된 AI 시대에 이 방식은 실제 반복 매출과 큰 괴리를 만들어낸다.

셀레스타 캐피탈(Celesta Capital)의 파운딩 매니징 파트너 마이클 마크스(Michael Marks)는 “밸류에이션이 높아지면서 이런 식으로 숫자를 부풀릴 유인도 커졌다”고 분석했다. 제너럴 카탈리스트(General Catalyst) CEO 헤만트 타네자(Hemant Taneja)가 지난해 한 팟캐스트에서 “1→3→9→27 성장은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1→20→100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AI 시대 스타트업에 기대되는 성장 속도는 비현실적으로 가팔라졌다.

VC는 왜 묵인하나

스티븐슨은 “일부 VC들이 이 관행에 동조한다”고 지적했다. 자기 포트폴리오에 ‘압도적 승자’가 있다는 서사를 만들고 싶은 유인 때문이다. 포트폴리오 회사가 높은 ARR을 발표하면 최고 인재와 고객이 몰린다. VC 입장에서 굳이 진실을 폭로할 이유가 없다.

지난해 50억 달러 기업가치로 평가받은 법률 AI 스타트업 클리오(Clio)의 공동창업자 겸 CEO 잭 뉴턴(Jack Newton)은 “일부 투자자들이 자기 회사가 숫자를 부풀리는 걸 눈감아준다. 외부에서 좋아 보이니까”라고 말했다.

헬스케어 AI 스타트업 헬로페이션트(Hello Patient) 공동창업자 겸 CEO 알렉스 코헨(Alex Cohen)은 “업계 내부에 있으면 다 가짜처럼 느껴진다. 헤드라인을 보면 ‘나는 안 믿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진짜 문제는 ‘나중’에 온다

모든 스타트업이 이 관행에 동조하는 건 아니다. 법률 AI 스타트업 워드스미스(Wordsmith)의 공동창업자 겸 CEO 로스 맥네언(Ross McNairn)은 “2022년 시장 조정 때 높은 밸류에이션을 정당화하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며 “지금 단기 이익을 위해 매출을 과장하면, 이미 비정상적으로 높은 밸류에이션 멀티플을 더 부풀리는 셈”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이 돼서 돌아온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상장 시장에서는 CARR이 아닌 ARR로 소프트웨어 기업을 평가한다. 비상장 시절 부풀린 숫자는 IPO 직전에 치명적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시사점: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예외 아니다

ARR 부풀리기 논란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글로벌 투자 유치 경쟁 속에서 비슷한 유혹에 노출돼 있다. 특히 AI 스타트업에 대한 기대가 급등하면서, ‘고성장 서사’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고 있다.

투자자와 창업자 모두 ARR이라는 세 글자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숫자 뒤에 얼마나 많은 계약이 실제 현금으로 전환됐는지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높은 밸류에이션의 화려함 뒤에 숨은 ‘착시’를 걷어내야, 건강한 스타트업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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