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로픽, AI가 실험장비 직접 조작하는 표준 ‘MHS’ 공개


지난달 앤트로픽(Anthropic)이 로봇 AI 기업 피지컬 인텔리전스를 인수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회사가 실제로 택한 길은 인수가 아니었다. 오픈AI처럼 자체 하드웨어 랩을 차리는 대신 로봇 하드웨어 위에 얹는 소프트웨어 계층을 만드는 쪽이었다. 그 전략의 실체가 나왔다.

앤트로픽, AI가 실험장비 직접 조작하는 표준 'MHS' 공개

앤트로픽이 AI 에이전트가 물리 장비를 직접 조작하는 표준 ‘모델 하드웨어 스탠더드(Model Hardware Standard, MHS)’의 리서치 프리뷰를 공개했다. 현미경과 액체 취급 장비, 로봇팔 같은 실험·제조 장비를 AI 에이전트가 동시에 다루면서 신약 후보 탐색 실험부터 양자컴퓨터의 레이저 정렬까지 수행하게 하는 규격이다. HHMI 자넬리아 리서치 캠퍼스(HHMI Janelia Research Campus)와의 공동 작업에서 시작됐다.

통합에 몇 달 걸리던 일을 몇 시간으로

실험실이나 공장에서 장비를 연동하는 데는 보통 몇 주에서 몇 달이 걸린다. 장비마다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가 제각각이라 전문가가 매번 맞춤 통합을 짜야 한다. 연결한 뒤에도 AI 에이전트와 데이터를 주고받거나 에이전트가 안전하게 장비를 조작할 공통 방법이 없었다.

MHS는 표준 드라이버로 이 문제를 푼다. ‘읽기'(온도 확인)와 ‘쓰기'(온도 설정) 같은 단순한 명령 집합을 쓰고, 각 장비를 표준 형식으로 노출해 장비와 에이전트가 중간 변환기 없이 서로를 찾아 통신하게 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코드만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자연어로 적어 넣는다는 점이다. 로봇팔의 무게처럼 안전하게 다루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지금까지는 종이 매뉴얼이나 담당자 머릿속에만 있던 정보다. 사용자가 직접 쓰거나, 에이전트가 사용자에게 장비 구성을 물어보며 채울 수 있다. 드라이버는 이 정보로 장비가 무엇을 측정하고 무엇을 조정할 수 있으며 어떤 안전 한계를 지켜야 하는지를 담은 참조 파일을 자동 생성한다.

제어는 MCP와 명령줄 인터페이스, 코드 파일(API) 세 가지로 이뤄지며, 한 줄의 코드로 여러 장비를 한꺼번에 조율할 수 있다. 에이전트가 매 단계 추론하기에 너무 길거나 빠른 작업은 드라이버 명령을 코드 파일로 묶어 장비가 알아서 수행하게 한다.

앤트로픽은 시험 과정에서 클로드가 과학자처럼 탐색적으로 움직였다고 밝혔다. 레이저를 조정하고 카메라로 결과를 관찰해 자기 조정이 광선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확인한 뒤 이를 반복했고, 그렇게 배운 것을 코드 파일로 묶어 매번 추론하지 않고도 명령 한 번으로 레이저를 정렬하는 스크립트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xJZrCFzTHY

두뇌가 아니라 두뇌와 손발 사이

MHS가 겨냥한 자리를 정확히 보려면 피지컬 AI 스택을 층으로 나눠 볼 필요가 있다.

맨 위에는 클로드 같은 오케스트레이션 에이전트가 있다. 그 아래에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이 있다. 엔비디아의 GR00T N1.7은 이미지와 언어를 입력받아 동작을 생성하는 VLA(vision-language-action) 모델로, 탁상용 로봇팔부터 휴머노이드까지 교차 적용된다. 피지컬 인텔리전스의 π0, 스킬드AI의 스킬드 브레인, 제너럴리스트의 GEN-1.5가 같은 층에 있다. 그 아래가 장치 추상화 계층이고, 맨 아래가 실제 하드웨어다.

MHS는 장치 추상화 계층을 노린다. 두뇌를 만드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파운데이션 모델들이 실제 장비를 움직이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다. 이 점에서 GR00T나 π0는 MHS의 경쟁자가 아니라 잠재적 사용자에 가깝다. 엔비디아 아이작(Isaac)은 시뮬레이션(Isaac Sim·Lab)과 미들웨어(Isaac ROS), 온로봇 추론 하드웨어(젯슨 토르)를 묶은 풀스택 플랫폼이지만, 자사 칩과 로봇을 전제로 설계돼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진짜 경쟁자는 실험실 표준들

그렇다면 MHS가 실제로 부딪히는 상대는 따로 있다. 이 계층에는 이미 표준이 여럿 있다.

실험실 자동화 표준 실라2(SiLA 2)는 웹 기술 기반이라 IT 팀이 다루기 쉽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정 산업 표준인 OPC UA 진영은 실험장비용 확장 규격 LADS를 내놓고 실라2와 경쟁하고 있다. 로보틱스 쪽에는 사실상의 표준인 ROS 2가 있다. 여기에 모드버스(Modbus)와 PLC 같은 레거시 산업 규격, 시리얼로 붙은 구형 장비가 한 실험실 안에 뒤섞여 있다.

통합이 어려운 이유는 표준이 없어서가 아니라 표준이 너무 많아서다. 그래서 MHS에는 고전적인 함정이 따라붙는다. 경쟁 표준이 여럿이라 통합 표준을 만들었더니 하나가 더 늘어나는 상황이다. MCP가 빠르게 표준이 된 것은 그 자리에 선행 표준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인데, 장치 추상화 계층은 사정이 다르다.

그럼에도 MHS가 기존 표준과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다. 실라2도 OPC UA도 기계끼리 통신하라고 만들어진 규격이지, LLM 에이전트가 처음 보는 장비를 이해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로봇팔이 몇 킬로그램인지, 어떤 조작이 위험한지를 자연어로 적어 두고 에이전트가 읽게 하는 발상은 기존 표준에 없다. 앤트로픽이 노린 빈틈이 여기다.

MCP를 한 번 성공시킨 회사

앤트로픽은 이 수법을 이미 한 번 성공시켰다. 2024년 11월 내놓은 MCP(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가 그것이다. AI가 외부 데이터·도구에 접근하는 방식을 표준화한 이 규격은 2025년 3월 오픈AI가 채택했고 구글 딥마인드와 마이크로소프트가 뒤따랐다. 같은 해 12월 앤트로픽은 MCP를 리눅스 재단 산하 에이전틱 AI 파운데이션에 기부했고 구글·마이크로소프트·AWS 등이 지원 멤버로 참여했다. 월 9,700만 건의 SDK 내려받기와 1만 개의 활성 서버가 그 결과다.

MHS의 설계도 같은 의도를 드러낸다. 클로드 전용이 아닌 모델 불문(model-agnostic) 규격이고, 어떤 에이전트 하네스든 MCP 같은 표준 프로토콜로 접근할 수 있으며, 오픈소스 공개를 예고했다. 경쟁사도 쉽게 쓰게 만드는 것은 손해처럼 보이지만 MCP를 표준으로 만든 방식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하드웨어를 팔지 않고 모두가 꽂아야 하는 구멍을 만드는 쪽이다.

다만 표준 싸움의 승부는 규격의 우수성이 아니라 배포에서 갈린다. 장비 제조사가 자사 제품에 무엇을 기본 탑재하느냐가 결정적이다. 이 관점에서 파트너 명단을 다시 보면 구성이 선명해진다. 다나허(Danaher)와 퀴아젠(QIAGEN), 테칸(Tecan)은 실험장비 업계의 거인이고, 오토마타(Automata)는 실험실 자동화 플랫폼에, MBF 바이오사이언스는 전 세계 수백 개 신경과학 연구실이 쓰는 레이저 주사 현미경 소프트웨어 스캔이미지(ScanImage)에 드라이버를 붙인다. AWS는 로봇 연결 라이브러리 스트랜즈 로봇(Strands Robots)에서, 허깅페이스(Hugging Face)는 로보틱스 라이브러리 르로봇(LeRobot)에서,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는 자사 제품 여러 종에서 MHS를 지원한다. 대형 연구시설부터 취미용 하드웨어까지 배포 경로를 동시에 까는 구성이다.

두산로보틱스도 참여

파트너 가운데 한국 기업이 하나 있다. 두산로보틱스(Doosan Robotics)가 로봇팔로 MHS를 시험하고 있다. 자동 품질 검사와 여러 로봇 간 작업 조율이 시험 항목이다. 협동로봇 분야의 또 다른 강자 유니버설 로봇(Universal Robots)도 조기 접근 권한을 받아 자사 플랫폼에 지원을 추가할 계획이어서, 협동로봇 양대 축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셈이다.

국내 로봇 업계 입장에서 이 표준이 자리 잡으면 진입 장벽이 낮아진다. 지금까지 로봇을 AI와 연결하려면 업체마다 맞춤 통합이 필요했지만 드라이버 하나로 어떤 에이전트든 붙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표준을 앤트로픽이 주도한다는 사실은 장기적으로 종속 문제를 남긴다. 규격을 정하는 쪽이 무엇을 안전 한계로 삼을지, 어떤 장비를 우선 지원할지를 함께 정하게 된다.

한계도 분명하다

앤트로픽은 이 표준이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밝혔다. 클로드는 물리 세계를 텍스트와 이미지로 배우기 때문에 공간·물리 추론에 한계가 있고 전문가 감독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넨텍(Genentech) 연구진이 단백질 시료를 다룰 때는 시료 거품 때문에 생긴 오류가 소프트웨어 버그가 아니라 물리적 실패이며 물리적 조치로만 해결된다는 점을 클로드에게 일러줘야 했다.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가 없는 장비는 아직 지원하지 않는다. 앤트로픽은 그런 장비 제조사들과 드라이버를 만들고 있으며, 리서치 프리뷰 기간에 안전성 평가를 추가하고 물리 세계 AI 사용에 대한 안전 로드맵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AI가 화면 안에서 글을 쓰는 것과 실험실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은 위험의 성격이 다르다. 표준을 만드는 쪽이 안전 기준까지 함께 설계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는 문제를 남긴다.

주요 AI 기업들의 투자 관계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하시길.

이 기사는 영문기사로 발행되었습니다: Anthropic Opens MHS, a Standard for AI Agents to Operate Lab and Factory Equip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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