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반도체 설계 ‘리커시브 인텔리전스’, 출범 두 달 만에 40억 달러 가치에  3억 달러 투자유치


인공지능이 반도체를 설계하고, 그 반도체가 다시 더 강력한 AI를 만드는 선순환 구조. 리커시브 인텔리전스(Ricursive Intelligence) 발표한 시리즈 A 투자 소식은 이 비전이 단순한 청사진이 아니라 실제 투자가 쏟아지는 현실임을 보여준다.

Ricursive Intelligence founders - 와우테일

리커시브 인텔리전스는 27일(현지시간) 라이트스피드 벤처 파트너스(Lightspeed Venture Partners) 주도로 3억 달러 규모의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했다고 밝혔다. 기업가치는 40억 달러로 평가됐다. DST 글로벌(DST Global), 엔비디아의 벤처캐피털 부문인 엔벤처스(NVentures), 펠리시스 벤처스(Felicis Ventures), 49 팜스 벤처스(49 Palms Ventures), 래디컬 AI(Radical AI), 세쿼이아 캐피털(Sequoia Capital)이 투자에 참여했다.

주목할 점은 투자 유치 시점이다. 리커시브는 지난해 12월 초 세쿼이아 캐피털 주도로 3,500만 달러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하며 공식 출범했다. 당시 기업가치는 7억5,000만 달러였다. 불과 두 달도 안 돼 기업가치가 5배 넘게 뛰며 유니콘 지위를 뛰어넘은 것이다. 설립 초기 스타트업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수십억 달러대 기업으로 성장하는 건 AI 시대에도 드문 사례다.

알파칩 개발자들의 새 도전

리커시브를 창업한 안나 골디(Anna Goldie) 아잘리아 미르호세이니(Azalia Mirhoseini)는 구글 딥마인드에서 알파칩(AlphaChip)을 공동 개발한 주역들이다. 알파칩은 강화학습을 활용해 반도체 배치 설계를 자동화하는 AI 시스템으로, 2020년 네이처(Nature)에 게재되며 학계와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기술은 구글의 AI 가속기인 TPU 4세대부터 6세대 트릴리움(Trillium)까지 실제 적용됐고, 엑시온(Axion) CPU를 비롯한 다른 구글 칩 설계에도 활용되고 있다. 외부 반도체 기업들도 알파칩을 도입했다.

골디는 MIT에서 컴퓨터공학과 언어학 학사, 전기전자공학 석사를 받았고 스탠퍼드에서 자연어처리 분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구글 브레인과 딥마인드를 거치며 시스템용 머신러닝 팀을 공동 창립했고, 앤트로픽에서 클로드(Claude) 개발에도 참여했다. 미르호세이니는 샤리프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 학사, 라이스 대학에서 전기컴퓨터공학 박사를 받았다. 구글 브레인과 딥마인드, 앤트로픽을 거쳤으며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조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그는 제미나이(Gemini)와 클로드 개발에 참여했고, 생성형 AI 모델에 널리 쓰이는 MoE(Mixture-of-Experts) 아키텍처 연구도 주도했다.

두 창업자는 알파칩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현재 최첨단 반도체 설계에는 2~3년이 걸린다. 이 긴 개발 주기가 AI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이들의 진단이다. 리커시브는 AI로 칩 설계 과정 전체를 가속화하고 자동화해, 수년 걸리던 작업을 몇 주나 며칠로 단축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운다.

더 본질적인 비전은 ‘재귀적 자기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AI가 칩 설계를 최적화하면, 그렇게 설계된 칩이 다음 세대 AI를 훈련시키는 데 쓰인다. 더 강력해진 AI는 또다시 더 나은 칩 설계를 내놓는다. 이런 순환이 반복되면서 AI 모델과 하드웨어 성능이 함께 빠르게 진화한다는 구상이다. 골디 CEO는 “AI 발전 속도는 하드웨어가 결정한다”며 “리커시브의 목표는 칩 설계를 근본적으로 가속화하고, 궁극적으로는 AI가 자기 자신을 구동할 칩의 설계를 최적화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르호세이니 CTO는 “최첨단 AI를 향한 진전은 지능과 컴퓨팅 효율성의 파레토 최전선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리커시브는 빠른 AI-하드웨어 공진화가 현실이 되는 미래를 만들고 있고, 이는 성능과 에너지 효율 양쪽에서 상당한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검증된 기술력에 쏟아진 자금

투자를 주도한 라이트스피드의 구루 차할(Guru Chahal) 파트너는 “리커시브는 현재 AI 업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병목, 즉 AI 발전과 반도체 역량 사이의 격차를 해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안나와 아잘리아는 알파칩으로 칩 설계에 새로운 접근법을 개척했다. 리커시브에서는 AI 모델과 그것을 구동하는 하드웨어 사이의 지속적인 개선 순환을 만드는 풀스택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며 “창업팀의 역량,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것의 야심, 그리고 이미 달성한 기술적 진전을 고려할 때 명확한 투자 결정이었다”고 덧붙였다.

엔비디아의 벤처 부문이 투자에 참여한 점도 눈에 띈다. 엔비디아는 한 달 전인 2025년 12월 EDA 소프트웨어 거대기업 시놉시스에 20억 달러를 투자한 데 이어 이번엔 신생 AI 칩 설계 스타트업에 베팅했다. 칩 설계 도구(시놉시스)부터 차세대 설계 플랫폼(리커시브)까지 AI 칩 생태계 전반에 투자를 확대하는 전략이다. 엔비디아는 2025년 들어 67건의 벤처 투자를 집행하며 전년도 54건을 크게 웃돌았다. AI 생태계 확장을 목표로 게임체인저와 시장 선도자가 될 스타트업들을 적극 발굴하고 있다.

리커시브는 이번 투자금을 연구 인력과 엔지니어 팀 확대, 컴퓨팅 인프라 증설에 사용할 계획이다. 출범 이후 구글 딥마인드, 앤트로픽, 애플, 케이던스(Cadence) 출신의 AI, 시스템, 실리콘 설계 전문가들을 영입하며 팀을 빠르게 키우고 있다.

EDA 시장의 지각변동

리커시브가 뛰어든 전자설계자동화(EDA) 시장은 시놉시스(Synopsys)와 케이던스 디자인 시스템스(Cadence Design Systems), 지멘스 EDA(Siemens EDA, 구 멘토 그래픽스)가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이들 3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업계를 지배해왔고, 현재 글로벌 EDA 시장의 75~80%를 장악하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시놉시스가 46%, 케이던스가 35.1%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과점 구조가 수십 년간 유지된 이유는 높은 진입장벽 때문이다. 칩 설계 팀이 특정 업체의 툴 플로우를 익히는 데 수년이 걸리고, TSMC나 삼성파운드리 같은 주요 파운드리의 최신 공정 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 인증 자체가 신규 진입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장벽이다.

그러나 AI가 이 구도를 흔들기 시작했다. 기존 EDA 업체들도 AI 기반 설계 자동화에 주력하고 있다. 시놉시스는 시놉시스닷AI(Synopsys.ai)라는 풀스택 AI 기반 EDA 스위트를 내놨고, 2026년 초 에이전트엔지니어(AgentEngineer)라는 자율 AI 에이전트를 출시해 2나노 칩 개발 주기를 12개월 단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케이던스는 세레버스(Cerebrus)와 이노버스(Innovus) 같은 툴에 AI를 통합하고 있다.

Ricursive Intelligence logo black Logo - 와우테일

하지만 리커시브의 접근은 다르다. 기존 업체들이 EDA 툴에 AI 기능을 추가하는 방식이라면, 리커시브는 처음부터 AI와 칩 설계의 긴밀한 결합을 전제로 설계 플랫폼을 구축한다. 알파칩이 배치 설계 단계에서 인간 엔지니어를 뛰어넘는 성능을 보였듯이, 리커시브는 설계 스택 전체를 AI로 자동화하고 최적화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시장도 변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 같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자체 칩을 설계하는 추세가 확산되면서, 칩 설계 경험이 부족한 신규 진입자들이 AI 기반 설계 툴에 더 의존하게 됐다. 2나노, 1.8나노 앵스트롬 시대로 접어들며 칩 설계 복잡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는 점도 AI 기반 자동화의 필요성을 높이고 있다.

AI 칩 개발사들의 투자 경쟁, 추론용 칩이 새로운 전장

리커시브의 급성장은 더 큰 흐름의 일부다. AI 반도체 시장 자체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칩 개발사들에 대한 투자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AI 모델을 실제 서비스에 적용하는 ‘추론(inference)’ 단계에서의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며 추론 전문 칩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은 2024년 529억 달러에서 2030년 2,956억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추론용 칩 시장은 2023년 158억 달러에서 2030년 906억 달러로 연평균 22.6% 성장이 예상된다.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수요의 70%가 AI 추론이 될 것으로 전망되며, 이는 훈련용보다 추론용 칩에 훨씬 더 큰 시장이 열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세레브라스(Cerebras): 웨이퍼 스케일 엔진(WSE) 3를 개발한 세레브라스는 4조 개의 트랜지스터와 90만 개의 코어를 탑재한 세계 최대 칩으로 유명하다. 2024년 9월 11억 달러 시리즈G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81억 달러를 달성했다. 2024년 10월 IPO를 추진했다가 철회했으나 2026년 2분기 재상장을 준비 중이다. 2026년 1월 현재 10억 달러 추가 투자를 논의하며 220억 달러 밸류에이션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로크(Groq): LPU(Language Processing Unit) 아키텍처로 초당 300토큰 생성을 달성한 그로크는 2025년 9월 7억5,000만 달러 시리즈D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69억 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나 2025년 12월 엔비디아가 200억 달러에 그로크의 기술을 라이선스하고 핵심 인력을 영입하는 계약을 체결하며 추론 칩 시장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에치드(Etched): 트랜스포머 전용 ASIC인 소후(Sohu) 칩을 개발하는 에치드는 블랙웰 GB200보다 10배 빠르다고 주장한다. 2024년 6월 1억2,000만 달러 시리즈A를 유치했고, 2026년 초 5억 달러를 50억 달러 밸류에이션으로 조달했다.

텐스토렌트(Tenstorrent): AMD의 전설적 칩 설계자 짐 켈러가 이끄는 텐스토렌트는 RISC-V 기반 AI 프로세서를 개발한다. 2024년 12월 삼성증권과 AFW파트너스가 주도한 시리즈D에서 6억9,300만 달러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26억 달러를 달성했다. 현대자동차, LG전자 등이 참여했다.

언컨벤셔널AI(Unconventional AI): 데이터브릭스 전 AI 책임자 나빈 라오가 2025년 12월 설립 2개월 만에 4억7,500만 달러를 유치하며 화제가 됐다. 시드 라운드로는 사상 최대 규모이며, 기업가치는 45억 달러로 평가됐다. 뉴로모픽 컴퓨팅과 아날로그 칩으로 기존 GPU보다 1,000배 더 효율적인 AI 가속기를 목표로 한다.

d-매트릭스(d-Matrix): 데이터센터용 생성형 AI 추론에 특화된 d-매트릭스는 2025년 11월 시리즈C에서 2억7,500만 달러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20억 달러를 달성했다. 마이크로소프트 M12, 카타르 투자청 등이 참여했다.

이들 기업의 급성장은 AI 칩 시장의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다. 2025년 한 해 동안 설립 3년 미만 스타트업 중 유니콘 지위를 획득한 기업은 46곳에 달했고, 이들이 합산해 유치한 투자는 39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중 36곳이 AI 관련 기업이며, 상당수가 AI 칩 개발사다. 특히 훈련보다 추론이 훨씬 더 많이 실행되기 때문에(챗GPT는 훈련 클러스터보다 추론 클러스터가 10배 이상 크다), 추론 전문 칩 기업들에게 거대한 시장이 열리고 있다.

AI 시대 하드웨어 병목을 해결하겠다는 리커시브의 도전이 실제로 업계 판도를 바꿀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두 달 만에 40억 달러 기업으로 도약한 속도와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투자자들의 지원을 고려하면, 이들의 실험은 AI와 반도체 산업 모두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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