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 연구 300개 도구 하나로 통합”…필로, 1,350만 달러 시드 투자 유치


박사 학위를 받은 지 며칠 만에 회사를 세운 스탠퍼드 연구자 2명이 생명과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필로(Phylo)가 안드레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a16z)와 멘로벤처스(Menlo Ventures)의 앤솔로지 펀드(Anthology Fund)가 공동으로 이끄는 1,350만 달러(약 135억원) 규모의 시드 투자를 유치했다고 발표했다. 앤트로픽(Anthropic)과 손잡고 만든 이 펀드는 생물의학 연구를 자동화하는 AI 에이전트 플랫폼의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었다.

phylo logo - 와우테일

필로는 AI 기반 ‘통합 생물학 환경(Integrated Biology Environment, IBE)’인 바이옴니 랩(Biomni Lab)을 선보이며 본격적인 상용 서비스에 돌입했다. 이 플랫폼은 과학자들이 복잡한 연구 작업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협업하는 과정을 AI 에이전트가 도와주는 통합 작업 공간이다. 이번 투자 라운드에는 제타(Zetta), 컨빅션(Conviction), SV엔젤(SV Angel), 발키리(Valkyrie) 등이 참여했으며, 세계적 수준의 엔젤 투자자들도 함께했다.

필로의 공동 창업자이자 CEO인 케신 황(Kexin Huang) 박사는 스탠퍼드 컴퓨터과학과에서 주레 레스코벡(Jure Leskovec) 교수 밑에서 연구하며 생명의학을 위한 AI에 10년 가까이 몰두해왔다. GSK, 제넨텍, 화이자 등 글로벌 제약사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그는 기술과 현장을 모두 아는 인물이다. 공동 창업자이자 사장인 유안하오 취(Yuanhao Qu) 박사는 암 생물학 박사 과정에서 실험과 계산 생물학을 두루 경험하며 케신의 AI 전문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은 2024년 6월 스탠퍼드에서 바이옴니(Biomni)라는 오픈소스 생물의학 AI 에이전트를 만들었다. 과학자들의 일상적인 연구 작업을 대신 처리해주는 이 도구는 현재 7,000개 이상의 연구실과 바이오제약·헬스케어 조직에서 쓰이고 있다. 바이옴니는 빠르게 퍼져나가 학계는 물론 병원, 바이오텍, 제약회사에서도 채택됐고, 과학자들이 실제 연구에 계속 사용하면서 그 가치를 입증했다.

생물학계의 ‘비주얼스튜디오’ 만든다

필로가 만든 바이옴니 랩을 이해하려면 프로그래머들이 쓰는 ‘IDE(통합 개발 환경)’를 떠올리면 된다. 과거 프로그래머들은 코드를 작성할 때 여러 프로그램을 오가며 작업했다. 한 곳에서 코드를 쓰고, 다른 곳에서 실행하고, 또 다른 곳에서 오류를 찾아야 했다. 이 과정이 너무 번거로워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데 비주얼스튜디오나 이클립스 같은 IDE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코드 작성, 실행, 디버깅, 테스트를 한 곳에서 모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동 완성 기능으로 코드를 빨리 쓸 수 있고, 오류가 생기면 바로 알려주고, 클릭 한 번으로 실행할 수 있다. 몇 시간 걸리던 작업이 몇 분으로 줄어들었다.

생물학 연구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과학자들은 논문을 검색하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실험을 설계하고, 결과를 정리하는 데 각각 다른 도구를 써야 한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형식을 바꾸고, 프로그램 간에 파일을 옮기고, 매뉴얼을 뒤적이며 시간을 낭비한다. 수주가 걸리는 분석 작업도 흔하다.

필로의 바이옴니 랩은 이런 단편화된 작업을 하나로 모은다. 300개 이상의 데이터베이스와 분석 도구를 한 곳에 연결해 놓았다. 과학자가 “이 유전자와 관련된 최신 논문을 찾아서 요약해줘” 또는 “이 데이터를 분석해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패턴을 찾아줘”라고 요청하면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처리한다. 멘로벤처스의 파트너 맷 크래닝(Matt Kraning)은 “필로는 생물학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IDE를 만들고 있다”며 “과학자들이 마침내 생각의 속도로 작업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 성능도 입증됐다. 바이옴니 랩의 새로운 에이전트 아키텍처는 표준 벤치마크와 실제 과학 평가에서 기존 AI 시스템을 20% 이상 앞섰다. 플랫폼은 컨센서스(Consensus), 코스믹(COSMIC), 애드진(Addgene) 같은 전문 데이터베이스와도 연결되어 대규모 학술 문헌, 암 유전체학 데이터, 플라스미드 정보 등에 접근할 수 있다.

케신 황 CEO는 “AI 시대의 생물학은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며 “생물학자들이 실제로 쓰는 도구와 최고 수준의 AI를 하나로 묶어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생산성 혁신을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유안하오 취 사장은 “지난 10년간 생명의학 연구가 얼마나 느렸는지 직접 봤다”며 “단편화된 작업 흐름과 반복 작업 때문이었는데, 바이옴니 랩은 고성능 AI 에이전트가 24시간 이런 일을 처리해 주단위 작업을 수분으로 줄이면서도 과학적 엄밀함은 그대로 유지한다”고 강조했다.

72일간 8,400명 몰렸다… 제약사들의 ‘러브콜’

필로는 실제 사용 사례로 플랫폼의 가치를 증명했다. 연구 프리뷰를 공개한 지 72일 만에 4,300개 조직에서 8,400명이 몰려들었다. 글로벌 상위 20개 제약사 중 18곳이 포함됐다.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노바티스(Novartis), 아스텔라스(Astellas)의 과학자들은 바이옴니 랩을 “가장 유능한 생물학 AI 시스템”으로 꼽았다.

한 대형 제약사와의 파일럿 테스트에서는 수주 걸리던 분석을 몇 시간으로 줄였다. 깅코 바이오웍스(Ginkgo Bioworks)와의 프로젝트에서는 10개 이상의 복잡한 세포 분석을 빠르게 처리했고, 깅코 과학자들이 결과를 검증했다.

a16z의 바이오+헬스 팀 파트너 호르헤 콘데(Jorge Conde)는 “사용자 채택은 투자 결정에서 가장 강력한 신호”라며 “생명과학 분야에서 학술 프로젝트가 이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고 실제 현장에서 계속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부터 CRISPR 개척자까지

필로는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자문단으로 영입했다. 과학 공동 창업자로는 스탠퍼드 컴퓨터과학 교수 주레 레스코벡 박사와 스탠퍼드 병리학 교수 르 콩(Le Cong) 박사가 함께한다. 창업 자문으로는 벤치링(Benchling)의 전 최고전략책임자 말레이 간디(Malay Gandhi)가 합류했다.

특히 과학 자문단은 화려하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 캐롤린 버토지(Carolyn Bertozzi) 박사, CRISPR 기술 개척자 펑 장(Feng Zhang) 박사, 계산생물학 선구자 파비안 타이스(Fabian Theis) 박사가 각각 생화학, 유전체학, 계산생물학 영역에서 방향을 제시한다.

에릭 슈밋이 주목한 시장, 경쟁은 치열하다

필로의 등장은 AI가 과학 연구의 판도를 바꾸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 시장에는 이미 주목할 만한 경쟁자가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퓨처하우스(Future House)다. 전 구글 CEO 에릭 슈밋(Eric Schmidt)이 자금을 대는 비영리 연구 조직으로, 2023년 설립됐다. MIT 출신 샘 로드리게스(Sam Rodriques)와 로체스터대 화학공학 교수 앤드류 화이트(Andrew White)가 이끈다. 퓨처하우스는 문헌 검색(Crow), 심층 분석(Falcon), 실험 화학(Phoenix) 등 각 작업에 특화된 AI 에이전트들을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퓨처하우스가 2025년 11월 에디슨 사이언티픽(Edison Scientific)이라는 영리 기업을 분사했다는 것이다. 에디슨은 7,000만 달러(약 700억원) 시드 투자를 받았고, 기업 가치는 2억5,000만 달러(약 2,500억원)로 평가됐다. 투자는 스파크캐피털(Spark Capital), 트라이아토믹캐피털(Triatomic Capital)이 공동 주도했고, 구글 수석과학자 제프 딘(Jeff Dean), 크라우드스트라이크(CrowdStrike) 공동창업자 드미트리 알페로비치(Dmitri Alperovitch) 등이 참여했다.

에디슨의 핵심 제품은 ‘코스모스(Kosmos)’다. 사용자가 “제2형 당뇨병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찾아줘”라고 요청하면 수백 개의 논문을 읽고 데이터를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다. 몇 시간이 걸리지만, 사람이 몇 달 걸릴 작업을 처리한다. 오픈AI의 샘 알트먼(Sam Altman)도 코스모스를 “AI의 가장 중요한 영향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필로와 퓨처하우스의 접근은 다르다. 퓨처하우스가 각 작업에 특화된 여러 에이전트를 만들었다면, 필로는 하나의 환경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IDE 같은 플랫폼을 지향한다. 퓨처하우스의 에디슨은 대규모 연구를 몇 시간 동안 처리하는 ‘깊이’에 집중한다면, 필로는 과학자들이 매일 쓰는 수백 가지 도구를 연결한 ‘통합’에 방점을 찍었다.

매킨지 조사에 따르면 제약·의료기기 업계 워크플로의 75~85%가 AI 에이전트로 자동화하거나 보강할 수 있다. 특히 초기 약물 발견과 과학 탐구 분야에서는 습식 실험, 데이터 분석, 규제 지원 등의 역량 21~30%를 확보해 연구 파이프라인을 확장하거나 임상시험을 앞당길 수 있다.

멘로벤처스와 앤트로픽의 1억 달러(약 1,000억원) 규모 앤솔로지 펀드는 이런 AI 스타트업을 지원하려고 2024년 7월 출범했다. 프리시드, 시드, 시리즈A 단계 AI 기업에 투자하며, 앤트로픽 모델을 쓸 수 있는 25,000달러 크레딧을 제공한다. 필로는 이 펀드 포트폴리오에서도 주목받는 기업이다.

필로는 앞으로도 바이옴니 오픈소스 플랫폼을 유지하며 커뮤니티를 키워나갈 계획이다. 기초 연구는 계속 공개하면서 검증된 기술을 상용 서비스에 적용하는 전략이다. 스탠퍼드와 다른 연구 그룹들과 협업하며 차세대 AI 모델 훈련, 실제 평가 벤치마크 구축, 새로운 생명의학 기능 개발이라는 세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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