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삼킨 벤처 시장…2025년 미국 VC 투자, 사상 두 번째 최고치


피치북(PitchBook)과 전미벤처캐피털협회(NVCA, National Venture Capital Association)가 공동 발간한 ‘Q4 2025 PitchBook-NVCA 벤처 모니터’에 따르면, 2025년 미국 벤처캐피털(VC) 시장은 총 $3,394억 규모의 딜을 기록하며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연간 투자 규모를 달성했다. 팬데믹 호황이 절정이었던 2021년($3,582억)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 격차는 불과 $188억에 그쳤다. 표면적 수치는 반등의 신호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시장’이 공존하는 극심한 양극화가 확인된다.

2025 Venture Monitor Deal Values - 와우테일

AI가 3분의 2를 가져갔다

2025년 한 해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AI의 해’다. 인공지능 및 머신러닝(AI/ML) 관련 딜이 전체 VC 투자 금액의 65.6%인 $2,221억을 차지했다. 이는 2024년 47.2%, 2015년 단 10%에 불과하던 것과 비교하면 폭발적인 증가세다. 피치북의 미국 벤처 리서치 디렉터 카일 스탠퍼드는 “챗GPT가 출시된 2022년 이후 AI 투자액은 $730억에서 $2,221억으로, 딜 건수는 24%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절반의 돈이 0.05%의 딜로 흘러들었다

화려한 총량 수치 뒤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전체 벤처 자금의 절반이 전체 딜의 단 0.05%에 집중됐다. 15년 만에 최고 수준의 자본 집중도다. 사실상 극소수의 초대형 AI 스타트업들이 시장 유동성의 대부분을 흡수한 셈이다. 2025년에 가장 많은 자본을 유치한 상위 10개 스타트업에 전체 VC 투자금의 41%가 쏠렸다.

유니콘 기업 총가치는 $4.3조에 달하지만, 상위 10개 기업이 전체의 51.8%를 차지할 정도로 쏠림이 심각하다. 오픈AI(OpenAI), 스페이스엑스(SpaceX), xAI, 앤트로픽(Anthropic) 등이 이 가치 팽창을 이끈 주역들이다. 한편 피치북의 밸류에이션 추정 분석에 따르면, 전체 857개 유니콘 중 222개는 기업 가치가 이미 $10억 아래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좀비 유니콘’이다.

주목해야 할 5가지 추가 트렌드

① 다운라운드(Down Round) 급증 — 전체 라운드 중 약 15%가 이전 라운드보다 낮은 밸류에이션으로 완료됐으며, 이는 10년 만에 최고치에 근접한다. 2021년 과열 당시 형성된 고평가 스타트업들이 현실적인 가격 조정을 받고 있다는 신호다. 반대로 AI 분야 스타트업들의 중위 프리머니 밸류에이션은 역대 최고를 경신하며, 2021년 수준마저 뛰어넘었다. 같은 시장에서 두 개의 상반된 현실이 공존한다.

② 초기 단계(Seed·Pre-Seed) 투자의 구조적 압박 — 딜 건수는 꾸준하지만 시드·프리시드 단계는 자금 조달 환경 악화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LP들이 유동성 회수에 어려움을 겪으며 신규 소형 펀드 결성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반응도 나타났다. 초기 스타트업들이 다운라운드를 피하거나 지분 희석을 막기 위해 벤처 부채(Venture Debt)로 눈을 돌리는 추세가 두드러졌다. 2025년 상반기 기준 전체 벤처 부채의 34.7%가 초기 단계 기업에 집중되며 6년 만에 최고 비중을 기록했다.

③ 세컨더리 시장의 급부상 — IPO 시장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세컨더리(Secondary) 거래가 핵심 유동성 출구로 자리잡았다. 피치북 추산 2025년 미국 벤처 세컨더리 시장 규모는 연간 $949억에 달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 찰스슈왑(Charles Schwab) 등 월가 대형 금융사들이 잇따라 세컨더리 관련 인수에 나서며 리테일 투자자들에게도 비상장 우량 기업 접근 통로를 열고 있다. 유동성은 AI·크립토·방산 분야 후기 단계 거대 기업에 집중되어 있어, 이 시장 역시 양극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④ 비전통적 투자자(Nontraditional Investors)의 역할 확대 — 전략적 투자자(CVC), 소버린 웰스 펀드(SWF, 국부펀드), 프라이빗 에쿼티(PE), 뮤추얼 펀드 등 전통적인 VC가 아닌 투자자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거대 AI 라운드의 주요 자본 공급원이 됐다. 일부 초대형 AI 라운드는 사실상 전통 VC보다 이들 비전통 투자자가 주도하는 양상이다.

2025 Venture Monitor fundraising - 와우테일

⑤ 펀드레이징의 극단적 양극화 — VC 자금 조달 환경은 ‘두 개의 시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체 펀드레이징 총액은 2018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지만, 안드레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a16z)는 2026년 1월 단숨에 $150억 펀드를 클로징했다. 이 금액은 2025년 한 해 VC 신규 약정 전체의 18% 이상에 해당한다. LP들의 돈이 브랜드 파워 있는 소수 대형 펀드로 집중되고, 신규·중소형 펀드는 자금 조달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엑시트는 반등했지만 갈 길이 멀다

2025년 미국 내 엑시트는 1,636건, 총 $2,978억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각각 28.5%, 92.7% 급증했다. IPO는 62건에 불과했지만 $1,194억의 가치를 만들어냈고, M&A는 995건에서 $1,127억을 기록했다. 그러나 2022년 이후 LP에게 돌아간 순현금흐름은 누적 약 $2,000억의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엑시트 가치가 두 배 가까이 늘었어도, 2021년의 화려함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2026년 전망: 조심스러운 낙관

피치북은 2026년의 출발점에 대해 “조심스러운 낙관론이 돌아오고 있다”고 평가한다. IPO 창구가 열리기 시작했고, 세컨더리 거래가 유동성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초기 단계 투자도 회복 조짐을 보인다. 그러나 6만여 개에 달하는 VC 지원 비상장 기업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자금 조달의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자본이 있는 투자자에게 협상력이 집중되는 구조가 심화되는 가운데, 승자와 패자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결국 2025년 미국 VC 시장의 핵심 키워드는 ‘회복이지만 불균등한 회복’이다. AI라는 거대한 조류 위에 올라탄 소수의 승자들은 사상 최대 규모의 자본을 끌어모았지만, 그 혜택에서 소외된 나머지 스타트업과 VC 펀드들에게 2025년은 여전히 험난한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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