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없이 500개 도시 누빈 英 자율주행 AI, 웨이브 15억 달러 유치


자율주행 기술을 둘러싼 수십 년의 개발 경쟁에서 가장 큰 숙제는 ‘확장성’이었다. 기존 시스템 대부분은 특정 도시의 고해상도 지도(HD Map)에 의존하고, 특정 센서 조합에 맞춰 설계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달리는 차가 런던에서 처음 마주치는 교차로에선 무력해지는 구조다. 막대한 자본을 쏟아붓고도 확장성의 벽을 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Wayve London 04 - 와우테일

웨이브(Wayve)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겨냥한다. 2017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실에서 출발한 이 회사는 도시별 맞춤 학습 없이 어디서든 작동하는 ‘범용 자율주행 AI’를 목표로 삼았다. 핵심은 엔드-투-엔드(End-to-End) 딥러닝 방식이다. 일반적인 자율주행 시스템이 인지→판단→제어를 각각 별도 모듈로 나눠 처리하는 것과 달리, 웨이브의 AI는 카메라로 들어오는 영상 데이터를 받아 스티어링과 가속·감속까지 하나의 신경망이 통합 처리한다. 마치 운전을 배우는 사람이 교과서 규칙을 외우는 게 아니라, 수많은 주행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감각을 익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 접근법이 실효성을 입증했다. 70개 이상 국가에서 수집한 다양한 주행 데이터로 훈련된 웨이브의 파운데이션 모델은 지난 1년간 사전 도시별 파인튜닝 없이 유럽·북미·일본 500개 이상 도시에서 주행 테스트를 완료했다. 이른바 ‘제로-샷(Zero-shot)’ 주행이다. 자율주행 업계에서 이 수준의 지역 범용성을 증명한 곳은 웨이브가 처음이다.

웨이브를 이끄는 공동창업자 겸 CEO 알렉스 켄달(Alex Kendall)은 뉴질랜드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컴퓨터 비전과 딥러닝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칼리지 펠로우 출신인 그는 2017년 웨이브를 공동 창업해 2020년 CEO를 맡았다. 영국왕립공학아카데미 은메달과 OBE(대영제국훈장)를 수상했으며, MIT 테크놀로지 리뷰 ’35세 이하 혁신가’에도 이름을 올렸다. 켄달은 테크크런치와의 인터뷰에서 “기술 체스판은 이미 각 회사의 전략에 따라 배치됐고, 이제는 상업화 체스판이 펼쳐지고 있다”며 “웨이브는 기술 접근법에서도, 비즈니스 모델에서도 역발상적 선택을 해왔다”고 밝혔다.

웨이브가 25일 발표한 시리즈 D 투자 유치 총 규모는 15억 달러다. 기본 투자금 12억 달러는 이클립스(Eclipse), 볼더튼(Balderton), 소프트뱅크 비전펀드 2(SoftBank Vision Fund 2)가 공동 주도했고, 온타리오 교원연금(Ontario Teachers’ Pension Plan), 베일리 기포드(Baillie Gifford), 영국 비즈니스 뱅크(British Business Bank) 등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이 신규 합류했다. 기업가치는 86억 달러로 평가됐다. 여기에 우버(Uber)가 로보택시 배포 실적에 연동된 마일스톤 기반 추가 투자 3억 달러를 더해 총액이 15억 달러로 확대됐다.

전략적 투자자들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는 웨이브의 AI 모델 학습 인프라로 애저(Azure)를 공급하며 투자를 이어갔다. 엔비디아(NVIDIA)와의 관계는 단순 투자를 넘어선다. 양사는 2018년부터 협력해왔고, 웨이브의 모든 세대 개발 차량에는 엔비디아 칩이 탑재됐다. 최신 Gen 3 플랫폼도 엔비디아 드라이브 AGX 토르(NVIDIA Drive AGX Thor) 기반이다. 

엔비디아는 차량용 컴퓨팅 칩과 AI 학습 인프라를 공급하고, 웨이브는 그 위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분업 구조다. 엔비디아 입장에서도 웨이브가 성공할수록 자사 칩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단순한 재무적 투자가 아니라 생태계 확장 전략의 일환이다. 다만 엔비디아가 DRIVE AV라는 자체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스택도 보유하고 있어 잠재적 경쟁 구도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웨이브가 “소프트웨어는 어떤 칩에서도 구동된다”는 하드웨어 무관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완성차 3사의 참여도 의미심장하다.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 닛산(Nissan), 스텔란티스(Stellantis)는 재무적 투자자이면서 동시에 웨이브의 AI 드라이버를 탑재할 잠재 고객이기도 하다. 닛산은 지난해 12월 웨이브와 차세대 운전자 지원 기술 도입을 위한 최종 계약을 체결한 상태다.

웨이브의 비즈니스 모델은 경쟁사인 웨이모(Waymo)나 테슬라(Tesla)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웨이모는 자체 로보택시 함대를 직접 운영하고, 테슬라는 자사 차량에만 소프트웨어를 탑재한다. 반면 웨이브는 AI 드라이버를 완성차 업체에 라이선스하는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플랫폼’ 전략을 택했다. 차량에 이미 탑재된 센서와 칩에서 구동되며, 고가의 라이다(LiDAR)나 별도 지도 인프라도 필요 없다. 이 모델의 잠재 시장은 전 세계에서 매년 팔리는 수천만 대의 신차 전부가 된다.

시장 경쟁은 치열하다. 웨이모는 구글 모회사 알파벳(Alphabet) 산하에서 2025년 한 해에만 1,400만 건의 로보택시 서비스를 제공했고, 2026년 기업가치 최대 1,100억 달러를 목표로 추가 자금을 모색 중이다. 모빌아이(Mobileye)는 완성차 업체에 ADAS(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를 공급하는 B2B 모델로, 2025년 3분기에만 920만 개의 EyeQ 시스템을 출하했다. 중국 바이두(Baidu)의 아폴로 고(Apollo Go)는 16개 도시에서 1,400만 건 이상의 자율주행 서비스 기록을 보유한 세계 최대 로보택시 운영사다. 웨이브가 이들과 차별화하는 핵심은 특정 지역이나 하드웨어에 묶이지 않는 범용성이다.

우버와의 파트너십은 로보택시 상업화 경로를 구체화한다. 양사는 2026년 런던에서 첫 서비스를 시작하고, 이후 전 세계 10개 이상 시장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웨이브가 AI 드라이버를 공급하고 우버가 차량을 소유·운영하는 방식이다. 소비자용 차량에는 2027년부터 핸즈-오프(L2+) 기능이 먼저 탑재되고, 이후 아이즈-오프(L3/L4) 완전 자율주행으로 확대된다.

켄달 CEO는 “15억 달러를 확보한 우리의 목표는 움직이는 모든 차량이 대상인 시장”이라며 “자율주행은 도시별 로보택시 배포만으론 확장할 수 없다. 완성차 업체와 플릿이 글로벌하게 배포하고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신뢰받는 플랫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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