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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NVIDIA) 젠슨 황(Jensen Huang) CEO가 6월 초 나흘간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SK·현대차·LG·네이버·두산·NC·크래프톤과 잇달아 협력을 발표했다. 반도체 메모리부터 AI 인프라, 피지컬 AI(Physical AI), 자율주행, 게임까지 — 한국 주요 산업의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이번 방한 테이블에 올랐다.
협약들을 들여다보면 공통된 패턴이 있다. 단순히 GPU를 사고파는 관계가 아니다. 엔비디아가 보유한 풀스택(Full-Stack) AI 생태계의 각 레이어에 한국 기업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가지고 맞물리는 구조다. 엔비디아의 전체 솔루션 지형에 대해서는 이 기사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삼성전자 — HBM4부터 HBM5까지, 메모리 동맹 재확인
삼성전자 DS(디바이스 솔루션)부문 전영현 부회장은 6월 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젠슨 황과 단독 회동했다. 별도 공식 발표 없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번 만남에서 양측은 단기와 중장기 협력 로드맵 전반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단기 과제는 HBM4(고대역폭 메모리 4세대) 및 소캠(SOCAMM) 공급 확대와 파운드리 협력 강화다. 중장기적으로는 HBM4E와 HBM5 공동 개발까지 논의가 이어졌다. 이미 지난해 10월 APEC 정상회의에서 삼성전자는 GPU 5만 개 이상 배포와 반도체 AI 팩토리 구축을 약속한 바 있다. 엔비디아의 CUDA-X 라이브러리와 cuLitho, 옴니버스(Omniverse) 플랫폼이 삼성전자의 반도체 설계·제조 워크플로우와 공장 디지털 트윈에 적용된다.
전영현 부회장은 이번 만남을 두고 오랜 협력 관계에서 가장 긍정적인 대화를 나눴다는 취지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 — 메모리는 SK하이닉스, AI 클라우드는 SK텔레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 정재헌 SK텔레콤 사장과 함께 젠슨 황을 만났다. 그룹 차원의 단일 테이블에서 두 갈래 협력이 동시에 이뤄졌다.
SK하이닉스 쪽에서는 차세대 AI 메모리 공동 개발이 핵심이다.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 네 가지 — 베라 루빈(Vera Rubin) AI 슈퍼컴퓨터, 베라(Vera) CPU, RTX 스파크(RTX Spark) PC, 젯슨 토르(Jetson Thor) 로보틱 플랫폼 — 에 탑재될 메모리를 다년간 공동 개발한다. 사실상 엔비디아 차세대 하드웨어 로드맵 전체에 SK하이닉스 메모리가 들어가는 구조다. 반도체 설계·제조 영역에서는 PhysicsNeMo 프레임워크와 CUDA-X 라이브러리를 자사 TCAD(기술 컴퓨터 지원 설계)·전산 리소그래피 워크플로우에 적용하고, 옴니버스와 OpenUSD로 반도체 공장 디지털 트윈을 구축한다. 최태원 회장은 양사가 “차세대 AI 팩토리용 메모리를 공동 개발하고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 AI를 적용해 AI 인프라의 미래를 함께 만들겠다”고 밝혔다.
SK텔레콤 쪽에서는 엔비디아 DSX(Data center Systems for eXascale) 플랫폼 기반 기가와트(GW)급 AI 클라우드의 한국 구축이 골자다. 2027년 첫 번째 데이터센터를 시작으로 아시아 전역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 클라우드 파트너 프로그램에 합류해 에이전틱(Agentic) AI·기업용 AI·피지컬 AI 서비스 제공 거점 역할을 맡는다. 앞서 GTC 타이베이 기조연설에서 젠슨 황이 SK텔레콤을 피지컬 AI 핵심 협력사로 직접 호명하면서 SK텔레콤 주가가 신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SK텔레콤의 자체 AI 모델 A.X K1이 엔비디아 네모트론(Nemotron) 데이터셋으로 훈련됐으며, 양사는 AI-RAN(AI 기반 무선 접근망) 기술도 공동 개발한다. 젠슨 황은 “통신 네트워크는 국가 AI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이버 — 기가와트급 AI 팩토리 공동 구축, 서울 월드 모델 개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젠슨 황은 네이버 본사 1784에서 직접 만났다. 네이버가 보유한 대규모 GPU 클러스터 구축·운영 역량과 엔비디아의 DSX 플랫폼을 결합해 기가와트급 AI 팩토리를 함께 키워나가는 것이 핵심이다. 각 세종 데이터센터를 거점으로 2027년 상반기 55MW 가동을 시작으로 단계적으로 규모를 확장한다.
AI 모델 개발에서는 두 가지가 주목된다. 하나는 ‘서울 월드 모델’ 구축이다. 엔비디아의 코스모스(Cosmos) 월드 파운데이션 모델에 네이버의 거리뷰 데이터를 결합해 물리 세계를 이해하는 공간 인텔리전스 모델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다른 하나는 엔비디아 네모트론 연합(Nemotron Coalition) 합류다. 커서(Cursor)·미스트랄AI(Mistral AI)·퍼플렉시티(Perplexity) 등 12개 글로벌 AI 기업이 참여하는 이 연합에 국내 기업 최초로 이름을 올렸으며, 네모트론 3 울트라 모델을 자체 데이터로 파인튜닝해 하이퍼클로바X(HyperCLOVA X) 성능 고도화에 활용한다. 이해진 의장은 이번 협력이 “각 국가가 독자적인 소버린 AI(Sovereign AI) 역량을 구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LG그룹 — 로봇에서 냉각 솔루션까지, 그룹 전체가 각자 역할로
구광모 ㈜LG 대표를 비롯해 LG전자·LG유플러스·LG CNS·LG AI연구원·LG이노텍·LG에너지솔루션 최고경영진이 여의도 LG트윈타워에 집결해 젠슨 황과 마주했다. LG그룹의 협력은 각 계열사가 엔비디아 생태계의 서로 다른 레이어를 담당하는 방식이다.
로봇 분야에서는 LG전자가 가정용 로봇 CLoiD에 아이작 심(Isaac Sim)·아이작 랩(Isaac Lab)으로 시뮬레이션과 검증을 진행하고, 아이작 GR00T(Isaac GR00T) 비전-언어 파운데이션 모델을 통해 복잡한 가정 내 작업 처리 능력을 부여한다. 코스모스 기반 피지컬 AI 데이터 팩토리에서 합성 훈련 데이터를 생성하고, LG CNS는 산업 현장용 로봇 플랫폼 ‘피지컬웍스(PhysicalWorks)’에 같은 프레임워크를 접목한다. LG이노텍은 엔비디아 아키텍처에 최적화된 로봇 비전용 고성능 센싱 모듈과 광학 부품을 개발한다.
AI 인프라에서는 LG유플러스와 LG CNS가 DSX 기반 대규모 AI 팩토리를 구축하고, LG전자는 차세대 GPU 서버용 냉각수 분배장치(CDU)와 콜드플레이트 인증 협력에 나선다. LG에너지솔루션은 800V 직류(DC) 기반 데이터센터 전력 솔루션을 엔비디아와 공동 개발한다. 자율주행에서는 LG전자 ADAS가 DRIVE AGX Thor 기반으로 고도화되고, LG이노텍이 차량용 통신 모듈·센싱·라이팅 솔루션을 엔비디아 아키텍처에 맞춰 개발한다. LG AI연구원의 엑사원(EXAONE) 모델은 블랙웰(Blackwell) GPU와 NeMo 프레임워크, 네모트론 데이터셋으로 학습·추론되며 TensorRT-LLM으로 최적화된다.
현대차그룹 — 30억 달러 AI 팩토리 딜, 이번 방한에서 새만금까지
현대차·기아와 엔비디아의 협력은 이번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약 30억 달러(약 4조 1천억 원) 규모의 AI 팩토리 딜은 지난해 10월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공식 발표됐고, 올해 3월 GTC 2026에서 자율주행 협력이 구체화됐다. 이번 6월 7~8일 이틀 연속 회동은 정의선 회장과 젠슨 황의 1년 새 네 번째 만남으로, 기존 협약을 심화하는 자리였다.
핵심 내용은 블랙웰 GPU 5만 개 기반의 통합 AI 모델 훈련·검증·배포 인프라 구축, 엔비디아 AI 기술센터와 현대차 피지컬 AI 애플리케이션 센터 신설이다. 모빌리티에서는 DRIVE Hyperion 플랫폼으로 레벨2+ 양산 차량부터 레벨4 로보택시까지 자율주행 역량을 단계적으로 고도화하고, 소프트웨어정의공장(SDF) 전환에 옴니버스·코스모스 기반 디지털 트윈을 활용한다. 로보틱스에서는 보스턴 다이나믹스(Boston Dynamics) 아틀라스(Atlas) 로봇의 공장·물류 투입을 아이작 심으로 시뮬레이션한다.
6월 8일 현대차 양재동 본사 방문에서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새만금 AI 밸리’ 합류 논의다. 정의선 회장이 직접 엔비디아에 합류를 제안했고, 젠슨 황은 긍정적인 의사를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두산그룹 — 에너지·로봇·전자소재, AI 팩토리 인프라의 숨은 파트너
두산그룹과 엔비디아의 협력은 기업 이름이 주목받는 빅딜보다 덜 알려졌지만, 구조는 그 못지않게 촘촘하다. 에너지·로봇·전자소재라는 두산의 핵심 사업이 엔비디아 생태계의 인프라 레이어 곳곳을 채운다.
에너지 측면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의 가스터빈·소형모듈원전(SMR)과 두산퓨얼셀의 수소연료전지가 AI 팩토리의 저탄소 전원 공급원으로 연결된다. 로보틱스에서는 두산로보틱스가 아이작 심·아이작 랩·코스모스 월드 모델, 젯슨 토르 엣지 디바이스를 활용해 에이전틱 로봇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디팔레타이징(Depalletizing)·샌딩 등 정밀 산업 현장 레퍼런스 솔루션을 구축한다. 두산밥캣은 건설·조경·농업·물류 장비에 피지컬 AI를 접목한다. 전자소재에서는 ㈜두산 전자BG가 AI 데이터센터 인프라용 동박적층판(CCL)을 공급하며 2028년 양산 목표로 태국에 신규 생산기지를 구축 중이다.
게임 — NC·크래프톤·T1, AI 게임 경험의 새 무대
게임 업계 회동은 이번 방한의 색다른 장면이었다. 젠슨 황이 직접 PC방을 찾아 게임사 대표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엔씨소프트(NC)는 엔비디아와의 파트너십 25주년을 맞아 김택진 대표와 함께 PC방에서 RTX 스파크 플랫폼 기반 신작 타이틀을 시연했다. 게임 산업에서 가장 오래된 협력 관계 중 하나를 AI 기반 게임 경험으로 이어가는 자리였다.
크래프톤은 장병규 의장과 AI 리더십진이 강남 PC방에서 PUBG 팬 이벤트를 열었다. RTX 스파크에서 구동되는 배틀그라운드와, 엔비디아 에이스(ACE) 기반 온디바이스 소형 언어 모델로 만든 AI 동반자 ‘PUBG 엘라이(Ally)’가 6월 중 베타 서비스에 들어간다. 크래프톤이 올해 초 설립한 루도 로보틱스(Ludo Robotics)의 휴머노이드 로봇 AI 연구 협력도 이번 자리에서 논의됐다. e스포츠 팀 T1도 이번 협력 생태계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이 엔비디아에게 특별한 이유
젠슨 황은 방한 기간 내내 한국이 제조·메카트로닉스·AI 분야에서 독보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엔비디아의 시각에서 한국은 AI 반도체 공급망(메모리), AI 인프라 구축(데이터센터·전력), 피지컬 AI 적용(로봇·제조)이 동시에 가능한 몇 안 되는 나라다.
이번 협약들을 레이어별로 정리하면 그 그림이 더 선명해진다.
레이어
엔비디아 솔루션
한국 파트너
메모리
HBM 공동개발
SK하이닉스, 삼성전자
AI 인프라 (DSX)
DSX OS · MaxLPS · Blackwell GPU
SK텔레콤, 네이버, LG CNS·유플러스, 두산
전력·냉각
CDU · 800V DC · SMR · 수소연료전지
LG전자·에너지솔루션, 두산에너빌리티·퓨얼셀
전자소재·부품
광학센서 · PCB(CCL)
LG이노텍, 두산 전자BG
피지컬 AI·로봇
Isaac Sim/Lab/GR00T · Cosmos · Jetson Thor
LG전자·CNS, 현대차, 두산로보틱스·밥캣, 크래프톤(루도)
자율주행
DRIVE Hyperion · AGX Thor
현대차·기아, LG전자
소버린 AI 모델
NeMo · Nemotron · TensorRT-LLM
네이버, LG AI연구원, SK텔레콤
반도체 설계·제조 AI
CUDA-X · PhysicsNeMo · cuLitho · Omniverse
SK하이닉스, 삼성전자
게임·콘텐츠
RTX Spark · ACE
NC, 크래프톤, T1
엔비디아에게 이번 방한은 GPU를 파는 자리가 아니었다. 한국 산업 전체를 자사 생태계의 각 레이어에 포지셔닝하는 자리였다.
“엔비디아 없인 안 되나” — 커지는 종속 우려
이번 방한을 계기로 한국 산업계 일각에서는 불편한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이 엔비디아 생태계의 하청 구조에 편입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다. CUDA 생태계는 GPU 병렬 컴퓨팅의 사실상 표준이 된 지 오래다. CUDA 위에서 훈련·추론되는 AI 모델, CUDA-X로 가속되는 반도체 시뮬레이션, 옴니버스 위에서 돌아가는 디지털 트윈 — 이 생태계에 한번 깊이 들어오면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AMD ROCm이나 인텔 플랫폼으로 갈아타는 데는 막대한 재투자가 따른다. SK하이닉스 HBM 수요는 이미 엔비디아 GPU 출하량에 연동돼 있고, 네이버·SK텔레콤·LG의 AI 팩토리 계획도 블랙웰·베라 루빈 GPU 공급을 전제로 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밸류체인의 분배다. AI 가속기 시장에서 엔비디아가 챙기는 마진은 압도적이다. 한국 기업들이 공급하는 메모리·기판·부품·냉각 솔루션은 기술적으로 정교하지만, 가격 결정권은 여전히 엔비디아 쪽에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 공급권을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론도 있다. 독자 AI 가속기를 개발하더라도 에코시스템 부재로는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고, 엔비디아 생태계 안에서 쌓은 기술력과 레퍼런스가 장기적 협상력의 자산이 된다는 시각이다. 네이버와 SK텔레콤이 자체 소버린 AI 모델을 병행 개발하고, LG가 엑사원(EXAONE)을 키우는 것은 이 종속 구도를 의식한 대응이기도 하다.
젠슨 황은 방한 마지막 날 “엔비디아가 원하는 것은 AI 인프라만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에코시스템을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에코시스템 안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느냐는, 결국 한국 기업들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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