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 편집 에피크리스퍼, 9천만 달러 시리즈C 투자유치


유전자 치료라고 하면 보통 잘못된 DNA를 잘라내거나 고쳐 쓰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런데 병의 원인이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꺼져 있어야 할 유전자가 켜져 있다’는 데 있다면, 굳이 DNA를 건드릴 이유가 없다. 스위치만 다시 내리면 된다. DNA 서열은 그대로 두고 발현만 조절하는 이 접근이 후성유전(에피제네틱) 편집이고, 그 첫 임상 데이터가 지금 근육 질환에서 나오고 있다.

후성유전 편집 에피크리스퍼, 9천만 달러 시리즈C 투자유치

프로그래머블 후성유전 치료제를 개발하는 에피크리스퍼 바이오테크놀로지스(Epicrispr Biotechnologies)가 9,000만 달러 규모 시리즈C 투자를 마무리했다고 11일 발표했다. 목표액을 넘겨 초과청약된 라운드다.

꺼져 있어야 할 유전자가 켜지는 병

에피크리스퍼가 겨냥하는 병은 안면견갑상완근이영양증(FSHD)이다. 이름 그대로 얼굴과 어깨, 위팔부터 근력이 빠지는 유전성 근육병으로, 원인은 DUX4라는 유전자다. DUX4는 배아 발생 초기에만 잠깐 일하고 그 뒤로는 평생 꺼져 있어야 하는데, FSHD 환자에게서는 이 스위치가 제대로 잠기지 않는다. 성인 근육에서 DUX4가 다시 켜지면 근세포가 죽어 나간다. 아직 병의 진행 자체를 늦추는 승인 치료제는 없다.

회사의 무기는 자체 플랫폼 GEMS(Gene Expression Modulation System)다. DNA 서열을 영구적으로 바꾸지 않으면서 특정 유전자를 선택적으로 켜거나 끄는 기술로, 유전자를 잘라내는 기존 크리스퍼와 달리 편집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창업자는 스탠퍼드대 생명공학자 스탠리 치(Stanley Qi) 교수다. 유전자를 자르지 않고 발현만 억제하는 CRISPRi 기법을 만든 인물이자 UC의 크리스퍼 특허 공동발명자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작은 Cas 단백질에 대한 독점 실시권을 회사에 들여왔다. 크기가 작아야 AAV 바이러스 벡터 하나에 다 실어 몸속 표적 장기까지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CEO 앰버 살츠먼(Amber Salzman) 박사의 이력은 조금 다른 결이다. 브린모어대에서 수학 박사를 받고 GSK에서 3만 명 규모 글로벌 임상과 1,600명 조직, 12억5,000만 달러 예산을 지휘했다. 이후 카디오카인(Cardiokine)을 이끌어 코너스톤 테라퓨틱스에 매각했고, 아나푸르나(Annapurna)를 공동창업해 애드베룸 바이오테크놀로지스(Adverum Biotechnologies) CEO를 지낸 뒤 오하나 바이오사이언스(Ohana Biosciences)를 거쳐 에피크리스퍼에 왔다. 그가 유전자 치료에 뛰어든 계기는 개인적이다. 2000년 12월 아들과 조카 두 명이 부신백질이영양증(ALD) 진단을 받자 자매들과 스톱ALD 재단을 세웠고, ALD 유전자 치료의 첫 인체 개념 증명을 끌어내는 데 앞장섰다. 신생아 선별검사 항목에 ALD를 넣는 작업에도 관여했다.

3명에게서 나온 첫 신호

선두 후보물질 EPI-321은 FSHD를 겨냥한 최초의 임상단계 후성유전 치료제다. 정맥으로 한 번 투여하면 AAV 벡터에 실려 근육 조직으로 전달되고, DUX4의 병적 발현을 억제한다. 반복 투여가 아니라 1회 투여로 설계됐다.

지난 6월 26일 공개한 1/2상 중간 결과가 이번 라운드의 근거다. 평가 가능한 첫 환자 3명에게서 MRI로 측정한 전신 제지방 근육량이 평균 약 370mL, 무게로 치면 0.8파운드가량 늘었다. 개인별로는 0.5~1.3파운드였고 일부 근육은 15%까지 증가했다. DUX4가 억제됐음을 시사하는 혈중 바이오마커 변화, 근력·기능 지표 개선, 관리 가능한 안전성도 함께 보고했다. 근육이 빠지기만 하던 병에서 근육량이 늘었다는 첫 임상 증거라는 점이 핵심이다. 미국과 뉴질랜드에서 진행 중인 1/2상은 환자 등록과 용량 증량을 모두 마쳤고, 추가 데이터는 연내 나온다.

물론 3명은 3명이다. 대조군 없이 소수 환자에서 나온 초기 신호이며, 회사가 이번 자금으로 하려는 일이 바로 그 규모를 키우는 허가용 임상이다.

살츠먼 CEO는 “이번 투자는 EPI-321과 차세대 프로그래머블 후성유전 치료제를 밀고 나가는 에피크리스퍼의 결정적 이정표”라며 “투자자 신디케이트의 면면이 우리가 플랫폼을 임상으로 옮기며 만들어낸 진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번 자금으로 EPI-321을 허가용 임상으로 진입시키고, 파이프라인을 넓히며, 환자를 위한 새로운 계열의 후성유전 치료제를 계속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헤지펀드와 전략 투자자가 함께 들어왔다

이번 라운드는 옥타곤캐피털(Octagon Capital)과 야누스헨더슨(Janus Henderson Investors)이 공동 주도했다. 피델리티(Fidelity Management & Research Company), 코머런트 애셋매니지먼트(Cormorant Asset Management), 듀케인 패밀리오피스(Duquesne Family Office), 사노피벤처스(Sanofi Ventures), abrdn 운용 펀드, 안젤리니벤처스(Angelini Ventures), 리드아웃캐피털(Readout Capital)과 기존 투자자들이 참여했다. 옥타곤캐피털의 안란 리(Anran Li) 박사가 이사회에 합류한다.

리 박사는 “에피크리스퍼는 프로그래머블 후성유전 의약품 분야의 리더로 자리 잡았다. 이 팀은 차별화된 플랫폼을 놀랍도록 짧은 기간에 EPI-321의 고무적인 초기 임상 데이터로 옮겨내며 탁월한 실행력을 보여줬다”며 “독자 기술과 강력한 리더십, 확장되는 임상 파이프라인을 볼 때 이 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치료 모달리티를 정의할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투자자 구성이 달라진 점도 눈에 띈다. 2022년 7월 5,500만 달러 시리즈A는 호라이즌스벤처스(Horizons Ventures)가, 2025년 3월 6,800만 달러 시리즈B는 앨리브리지그룹(Ally Bridge Group)이 이끄는 전형적인 벤처 라운드였다. 시리즈B에는 룰루레몬(Lululemon) 창업자이자 본인이 FSHD 환자인 칩 윌슨(Chip Wilson)이 세운 벤처 자선단체 SOLVE FSHD도 들어왔다. 이번 시리즈C에는 상장 헬스케어에 투자하는 크로스오버 펀드와 헤지펀드가 대거 이름을 올렸다. 상장을 염두에 둔 자금 성격이 짙어졌다는 뜻이다. 누적 조달액은 2억1,300만 달러가 됐다.

8만 명짜리 시장에 왜 다 몰리나

의아한 대목이 있다. FSHD는 큰 시장이 아니다. 유병률이 8,000~2만 명당 1명 수준이고 미국 환자가 약 8만 명이다. 시장조사기관 추정치도 2024년 2억1,000만 달러에서 2034년 4억8,200만 달러 정도로,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멀다. 노바티스가 어비디티에 치른 120억 달러도 FSHD 하나 값이 아니라 근긴장성이영양증(DM1)과 뒤셴근이영양증(DMD)까지 묶은 플랫폼 전체 값이다. 그런데도 글로벌 제약사와 플랫폼 기업이 이 좁은 판에 줄줄이 들어와 있다.

이유는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DUX4가 지나치게 깨끗한 표적이다. 대부분의 병은 원인 유전자가 여럿이거나 아예 불분명한데, FSHD는 “꺼져 있어야 할 유전자 하나가 켜졌다”로 정리된다. 유전자 발현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하는 기술을 증명하기에 이만한 무대가 없다.

둘째, 여기서 되면 다음이 열린다. 에피크리스퍼의 GEMS도, 튠 테라퓨틱스의 TEMPO도 특정 약이 아니라 플랫폼이다. 한 질환에서 임상 데이터가 나오면 같은 기술로 다른 적응증을 계속 열어갈 수 있다. 실제로 튠은 훨씬 큰 시장인 만성 B형간염을 첫 적응증으로 골랐다. FSHD는 이들에게 시장이라기보다 관문에 가깝다.

셋째, 희귀질환 경제학이 성립한다. 환자 수가 적어도 환자당 약값이 수억 원대로 매겨지고, 희귀의약품 지정에 따르는 세제 혜택과 독점 판매 기간, 가속승인 경로가 따라붙는다. 임상 규모가 작아 개발 비용도 덜 든다. 8만 명 시장이 재무적으로 굴러가는 이유다.

그러니 이 경쟁은 큰 시장을 나눠 먹으려는 싸움이 아니다. 기술을 증명하기 좋은 작고 명확한 시장에 모두가 자기 방식의 답안지를 들고 모인 것에 가깝다. 노바티스가 먼저 승인을 받아도 게임이 끝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쟁 구도: 이미 앞서 있는 노바티스

FSHD 치료제 경쟁에서 에피크리스퍼는 선두가 아니다. 가장 앞선 건 노바티스(Novartis)의 델파시바트 브락슬로시란(del-brax)이다. 원래 어비디티 바이오사이언스(Avidity Biosciences)가 개발하던 항체-올리고 접합체로, 항체를 택배 기사처럼 써서 DUX4의 mRNA를 겨냥해 분해한다. 노바티스는 지난해 10월 어비디티를 약 120억 달러 전액 현금에 인수하기로 합의하고 올해 2월 27일 거래를 마쳤다. 그리고 6월, 1/2상 포티튜드(FORTITUDE) 바이오마커 코호트에서 1차 지표와 주요 2차 지표를 모두 충족했다고 발표했다. 올해 하반기 가속승인 신청을 낼 계획이고 3상도 환자를 모으고 있다. 순조롭다면 FSHD의 유전적 원인을 겨냥한 첫 치료제가 된다.

다만 접근 방식이 다르다. del-brax는 mRNA를 계속 분해하는 반복 투여 약이고, EPI-321은 스위치 자체를 눌러 놓는 1회 투여 약이다. 효과가 얼마나 오래 가느냐, 그리고 환자가 평생 주사를 맞아야 하느냐가 갈리는 지점이다. 에피크리스퍼가 “지속성”을 반복해 강조하는 이유다.

앞서 이 시장을 노렸던 풀크럼 테라퓨틱스(Fulcrum Therapeutics)의 로스마피모드(losmapimod)는 DUX4 활성을 조절하는 효소를 막는 경구약이었으나 3상에서 실패해 개발이 중단됐다. 애로우헤드 파마슈티컬스(Arrowhead Pharmaceuticals)도 DUX4 프로그램을 갖고 있으며 2024년 11월 사렙타(Sarepta Therapeutics)와 협업 계약을 맺었다.

후성유전 편집이라는 기술 자체를 놓고 보면 판은 또 달라진다. 가장 자금이 두둑한 곳은 튠 테라퓨틱스(Tune Therapeutics)로, 2025년 1월 NEA와 리제네론벤처스 등에서 1억7,500만 달러 이상 시리즈B를 유치했다. 이쪽은 만성 B형간염을 첫 적응증으로 잡고 지질나노입자(LNP)로 약물을 전달한다. 크로마 메디신과 엔벨롭이 합친 엔크로마 바이오(nChroma Bio)도 후성유전 침묵 기술로 간 질환을 노리고, 샌가모 테라퓨틱스(Sangamo Therapeutics)는 징크핑거 단백질로 같은 문제를 푼다. 다만 이들 중 실제 환자에게서 질병 조절 신호를 보여준 곳은 아직 에피크리스퍼가 유일하다. 이번 라운드가 초과청약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영문기사로 발행되었습니다: Epicrispr Closes $90M Series C to Push the First Epigenetic Therapy for FSHD Into Pivotal Tri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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