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하나를 개발하는 데 평균 10년의 시간과 1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든다. 그럼에도 임상시험까지 간 신약 후보물질 중 실제로 환자에게 도달하는 건 고작 10%에 불과하다. 이 지독한 비효율을 AI가 뒤집을 수 있을까? 최근 글로벌 빅파마들의 움직임을 보면,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다.
피치북(PitchBook)이 지난 26일에 발표한 ‘AI 신약개발’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2개월간 AI 신약개발 분야에 32억 달러가 135건의 딜로 투자됐다. 더 놀라운 건 밸류에이션이다. AI 기반 바이오텍 기업들의 기업가치 중간값은 업계 평균의 거의 2배에 달한다. 2024년 기준으로 AI 네이티브 바이오텍의 투자 전 기업가치 중간값은 7800만 달러로, 전체 바이오파마 업계의 4000만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이 열기의 배경에는 실질적인 성과가 있다. 초기 연구에 따르면, AI로 발굴한 신약 후보물질의 1상 임상시험 성공률은 80~90%로 업계 평균(40~65%)의 거의 두 배다. 아직 표본이 적긴 하지만, 이 수치가 유지된다면 신약개발의 전체 성공 확률이 기존 8%에서 16%로 두 배 가까이 높아질 수 있다.
단백질 구조를 읽는 AI의 등장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단백질이다. 인체의 모든 기능은 결국 단백질이 수행한다.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알면 어디에 약을 결합시켜야 하는지, 어떤 모양의 분자가 효과적일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구조를 실험으로 규명하려면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의 알파폴드(AlphaFold)가 이 판을 바꿨다. 2020년 단백질 구조 예측 대회 CASP14에서 실험과 거의 같은 정확도를 달성한 뒤, 2억 개 이상의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 무료로 공개했다. 공동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와 존 점퍼(John Jumper)는 이 공로로 2024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최신 버전인 알파폴드3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단백질뿐 아니라 DNA, RNA, 의약품에 필수적인 리간드와의 상호작용까지 예측할 수 있다. 워싱턴대학교 단백질 디자인 연구소의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 교수팀이 개발한 RFdiffusion은 아예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단백질을 ‘상상’해낸다. 이미지 생성 AI처럼 노이즈에서 시작해 점점 선명한 단백질 구조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베이커 교수 역시 2024년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다.
10억 달러 클럽: AI 바이오텍 대형 투자 현황
AI 바이오텍에 대한 투자자들의 확신은 투자 규모에서 드러난다.
자이라 테라퓨틱스(Xaira Therapeutics)는 2024년 4월 설립과 동시에 10억 달러를 조달했다. 아크 벤처 파트너스(ARCH Venture Partners)와 포어사이트 캐피탈(Foresite Capital)이 공동 주도했고, 세쿼이아 캐피탈(Sequoia Capital), 럭스 캐피탈(Lux Capital), 라이트스피드 벤처 파트너스(Lightspeed Venture Partners) 등이 참여했다. 젠엔테크(Genentech) 최고과학책임자 출신의 마크 테시어-라빈(Marc Tessier-Lavigne)이 CEO를 맡았고, 데이비드 베이커 교수가 공동 창업자로 이름을 올렸다. 자이라는 베이커 연구소의 RFdiffusion과 RFantibody를 기반으로 전통적 방식으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치료제를 설계한다. 수만 개의 분자를 테스트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AI 설계 단백질은 첫 시도에서 원하는 성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는 구글 딥마인드에서 분사한 회사로, 노벨상 수상자 데미스 하사비스가 직접 이끈다. 2025년 3월 스라이브 캐피탈(Thrive Capital) 주도로 6억 달러를 조달했는데, 회사 설립 4년 만에 첫 외부 투자다. 이소모르픽은 알파폴드 기술을 활용해 저분자 신약을 설계한다. 회사의 야망은 원대하다. “언젠가는 질병을 입력하면 버튼 하나로 치료제 설계가 나오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현재 종양학 분야 임상시험 진입을 준비 중이다.
인시트로(insitro)는 스탠퍼드대 대프니 콜러(Daphne Koller) 교수가 창업한 회사로, 6억4300만 달러 이상을 조달했다. 인시트로의 접근법은 조금 다르다. AI와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를 결합해 실제 환자의 세포를 모델링하고, 이를 통해 질병의 근본 원인을 찾는다.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Bristol Myers Squibb)와 루게릭병(ALS) 치료제 개발을 위해 20억 달러 규모의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2024년 말에는 새로운 ALS 타겟을 발굴해 2500만 달러의 마일스톤을 받았고, 2025년 10월 협력을 확대했다.
인실리코 메디신(Insilico Medicine)은 AI로 신약 타겟 발굴부터 분자 설계, 임상시험 예측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Pharma.AI 플랫폼을 운영한다. 2025년 3월 밸류 파트너스(Value Partners) 주도로 1억1000만 달러 시리즈 E를 조달했으며, 1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특발성 폐섬유증(IPF) 치료제가 2상 임상을 완료했고, 홍콩 IPO를 추진 중이다.
릴라 사이언시스(Lila Sciences)는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Flagship Pioneering)에서 탄생한 회사로, ‘과학적 초지능(scientific superintelligence)’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내걸었다. 2025년 3월 2억 달러 시드 투자로 등장한 뒤, 9월에는 브레이드웰(Braidwell)과 콜렉티브 글로벌(Collective Global) 주도로 2억3500만 달러 시리즈 A를 추가 조달해 유니콘이 됐다. 엔비디아 벤처스(NVentures), CIA 산하 인큐텔(In-Q-Tel) 등이 투자자로 참여했다. 크리스퍼(CRISPR) 기술 선구자 조지 처치(George Church)가 최고과학책임자로 합류해 눈길을 끌었다. 릴라의 핵심은 완전 자동화된 AI 과학 공장이다. AI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설계하고, 실제로 로봇 팔로 실험을 수행한 뒤 결과를 학습해 다음 실험에 반영한다. 이 사이클을 수천 번 반복하며 인간 과학자 수십 명이 수년간 할 일을 몇 주 만에 해낸다.
AI 바이오텍의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건 빅파마들이 체결한 대형 딜이다. 피치북 보고서가 정리한 주요 파트너십과 추가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발로 헬스(Valo Health) – 노보 노디스크(Novo Nordisk): 46억 달러 플래그십 파이어니어링 출신 발로 헬스는 노보 노디스크와 비만, 제2형 당뇨, 심혈관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해 46억 달러 규모의 확대 파트너십을 체결했다(2025년 1월). 2023년 27억 달러 규모로 시작한 협력이 70% 확대됐다. 발로의 Opal 플랫폼은 실제 환자 데이터에서 새로운 치료 타겟을 찾고, AI로 저분자 약물을 설계한다. 현재 최대 20개 신약 프로그램을 공동 개발 중이다.
제너레이트 바이오메디신스(Generate:Biomedicines) – 암젠 & 노바티스: 29억 달러 플래그십 계열사인 제너레이트 바이오메디신스는 단백질 치료제의 ‘생성형 AI’를 표방한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단백질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처음부터 설계된 단백질을 만든다. 암젠과는 2022년 19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체결했고, 2024년에는 6번째 프로그램까지 확대했다. 노바티스와는 2024년 9월 10억 달러 규모 딜을 추가로 맺었다.
인시트로(insitro) –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 20억 달러 이상 인시트로는 AI 기반 줄기세포 모델링으로 루게릭병의 근본 원인을 찾는다. 브리스톨-마이어스 스퀴브와 2020년 시작한 협력이 2025년 10월 연장됐다. ChemML 플랫폼을 활용해 발굴한 새로운 ALS 타겟에 대한 신약 개발에 나선다. 성공 시 20억 달러 이상의 마일스톤과 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
매니폴드 바이오(Manifold Bio) – 로슈: 20억 달러 매니폴드 바이오는 약물이 특정 조직으로 전달되도록 돕는 ‘셔틀’ 기술을 개발한다. 2025년 11월 로슈와 20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핵심은 뇌-혈관 장벽(BBB) 통과다. 대부분의 약물은 이 장벽을 넘지 못해 뇌질환 치료가 어렵다. 매니폴드의 AI 시스템은 수백만 개의 셔틀 후보를 살아있는 동물에서 직접 테스트해 최적의 분자를 찾는다. 조지 처치 교수의 제자들이 창업했다.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 – 일라이 릴리 & 노바티스: 29억 달러 아이소모픽 랩스는 2024년 1월 일라이 릴리와 17억 달러, 노바티스와 12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동시에 발표했다. 두 빅파마 모두 알파폴드 기술을 활용한 저분자 신약 발굴에 베팅했다.
슈퍼루미널 메디신스(Superluminal Medicines) – 일라이 릴리: 13억 달러 슈퍼루미널은 GPCR(G단백질결합수용체)라는 까다로운 타겟을 공략한다. 세포 표면에 있는 이 수용체는 수많은 생리 기능을 조절하지만, 구조가 복잡해 약물 개발이 어려웠다. 2025년 8월 일라이 릴리와 비만 및 심장대사질환 치료제 개발을 위해 13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슈퍼루미널의 AI 플랫폼은 단백질의 역동적인 움직임까지 모델링해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약물을 설계한다.
인실리코 메디신(Insilico Medicine) – 사노피: 12억 달러 인실리코는 2022년 사노피와 최대 6개 신약 타겟 발굴을 위해 12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Pharma.AI 플랫폼의 세 가지 모듈(타겟 발굴용 PandaOmics, 분자 설계용 Chemistry42, 임상시험 예측용 InClinico)을 모두 활용한다.
아톰와이즈(Atomwise) – 사노피: 12억 달러 아톰와이즈는 딥러닝으로 분자 구조를 분석해 후보물질을 찾는다. 3조 개 이상의 합성 가능한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AI로 검색해 최적의 약물을 발굴한다. 2022년 사노피와 12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맺었다.
크레용 바이오(Creyon Bio) – 일라이 릴리: 10억 달러 크레용 바이오는 올리고뉴클레오타이드(짧은 합성 DNA/RNA 조각) 치료제 설계에 양자화학 원리를 적용한다. 2025년 4월 일라이 릴리와 10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기존의 시행착오 방식 대신 분자 수준의 시뮬레이션으로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제를 설계한다.
나블라 바이오(Nabla Bio) – 다케다: 10억 달러 나블라 바이오는 다케다와 단백질 치료제 발굴을 위해 10억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알젠 바이오(Algen Bio) – 아스트라제네카: 5억5500만 달러 알젠 바이오는 아스트라제네카와 면역학 분야 신약 타겟 발굴을 위해 5억5500만 달러 규모 파트너십을 맺었다.
AI 제약 도구와 서비스: 또 다른 성장 축
신약을 직접 개발하는 것 외에 AI를 도구로 제공하는 기업들도 급성장하고 있다. 2025년 첫 3분기에만 71건의 딜로 8억1400만 달러가 투자됐다.
벤치사이(BenchSci)는 과학자의 AI 비서를 표방한다. 수백만 건의 논문, 실험 데이터, 시약 정보를 통합한 지식 그래프를 구축하고, 연구자가 실험을 설계할 때 최적의 시약과 방법을 추천한다. 2억 달러 이상을 조달했고, 서모 피셔 사이언티픽(Thermo Fisher Scientific), 사노피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상위 20대 제약사 중 16개가 벤치사이의 ASCEND 플랫폼을 사용한다.
AI 신약개발의 과제와 전망
장밋빛 전망만 있는 건 아니다. 피치북 보고서는 몇 가지 핵심 과제를 짚는다.
첫째, 데이터 문제다. 알파폴드가 학습한 단백질 데이터베이스(20만 개 이상의 구조)는 예외적인 경우다. 세포 반응, RNA 구조, 독성 데이터 등은 기업별로 흩어져 있고 품질도 들쭉날쭉하다. 이런 상황에서 고품질 데이터를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기업(자이라, 릴라 등)이 경쟁 우위를 갖는다.
둘째, 검증의 어려움이다. 챗GPT가 만든 글은 바로 평가할 수 있지만, AI가 설계한 단백질은 실제로 만들어 테스트해봐야 한다. 이 과정이 느리고 비싸다.
셋째, 바이오 보안 위협이다. 새로운 유전체 파운데이션 모델은 바이러스 게놈을 최적화하거나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AI 기반 바이오 보안 플랫폼 발토스(Valthos)가 최근 오픈AI, 럭스 캐피탈, 파운더스 펀드 등으로부터 3000만 달러 시리즈 A를 유치한 배경이다.
자이라 테라퓨틱스와 아이소모픽랩스 같은 선두 기업들이 향후 몇 년 내 임상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AI가 설계한 신약이 실제 환자에게서 효과를 보일지가 이 기술의 진정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실험 설계와 임상시험 최적화에서 AI의 역할은 계속 커지겠지만, 결국 AI 발굴 신약의 임상 성공 여부가 업계 전체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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