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분야의 팔란티어’라는 착각…”핵심은 플랫폼이다”


“우리는 X 분야의 팔란티어입니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피치덱에 새로운 클리셰가 등장했다. 안드레센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 a16z)의 파트너 마크 안드러스코(Marc Andrusko)는 최근 발표한 분석 보고서 “모든 것의 팔란티어화(The Palantirization of Everything)“에서 이런 현상을 진단하며, 동시에 날카로운 경고를 던진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팔란티어 모델의 가장 어려운 부분, 즉 진정한 플랫폼 구축은 빼놓고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이다.

palantir logo - 와우테일

실제로 ‘포워드 디플로이드 엔지니어(Forward Deployed Engineer, FDE)’ 채용 공고는 2025년 전년 대비 1,165% 폭증했다. 10월은 FDE 채용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달이었다. 오픈AI(OpenAI), 램프(Ramp) 같은 AI 스타트업들이 앞다퉈 FDE 팀을 꾸리고 있다. 하지만 a16z는 묻는다. “이들 중 얼마나 많은 기업이 팔란티어처럼 그 밑에 강력한 플랫폼을 갖추고 있는가?”

AI 시대의 킬러 비즈니스 모델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Palantir Technologies)는 2003년 페이팔 공동 창업자 피터 틸(Peter Thiel)이 설립한 빅데이터 분석 기업이다. 초기에는 CIA와 국방부를 주요 고객으로 삼아 9·11 이후 흩어진 정보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2011년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며 명성을 얻었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병사들을 구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팔란티어를 진짜 승자로 만든 것은 2023년 출시한 인공지능 플랫폼(AIP, Artificial Intelligence Platform)이다. 2024년 주가는 340% 폭등하며 S&P 500 최고 성과주가 됐고, 현재 시가총액은 약 4천억 달러에 달한다. 2024년 3분기 미국 상업 부문 매출은 전년 대비 54% 급증했고, 고객사는 77% 늘었다.

팔란티어의 성공 공식은 세 가지다. 첫째, 통합 플랫폼. 팔란티어의 제품들(Gotham, Foundry, Apollo, AIP)은 느슨한 컴포넌트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운영 체제처럼 작동한다. 둘째, 고객사에 엔지니어를 파견하는 FDE 모델. 셋째, 미션 크리티컬한 정부·방산 환경에서의 입증된 성공 사례다. a16z가 지적했듯, “팔란티어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해낸 거의 유일한 회사”다.

‘5일 안에 실전 배포’라는 약속

팔란티어의 가장 강력한 영업 무기는 ‘AIP 부트캠프’다. 이는 5일 안에 고객사의 실제 데이터를 활용해 작동하는 AI 워크플로우를 구축해주는 집중 프로그램이다. 핵심은 단순한 데모가 아니라 ‘실전 배포’라는 점이다. 팔란티어의 FDE들은 고객사 현장에 상주하며 복잡한 레거시 시스템을 연결하고, 몇 달이 걸릴 작업을 며칠 만에 완성한다.

효과는 입증됐다. 한 주택 건설업체는 시범 운영부터 4천만 달러 규모의 다년간 계약 전환까지 3분기 안에 모두 마쳤다. 팔란티어는 2024년 8개월간 140개 이상의 부트캠프를 진행했는데, 이는 2023년 한 해 미국 상업 부문 파일럿 수보다 많은 수치다. AIP 사용자는 분기마다 3배씩 증가했다.

이런 성공은 AI 도입의 현실적 문제를 정확히 겨냥했기 때문이다. 2025년 여러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88%의 기업이 AI를 실험하지만, 실제로 조직 전체에 배포한 곳은 33%에 불과하다. AI 프로젝트의 70% 이상이 파일럿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MIT 연구에 따르면 95%의 생성형 AI 프로젝트가 기존 워크플로우에 통합되지 않아 손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우리는 X 분야의 팔란티어’ 열풍

a16z의 분석에 따르면, 스타트업 피치덱에 “우리는 X 분야의 팔란티어”라는 문구가 새로운 클리셰로 자리 잡았다. FDE 채용 공고는 2025년 전년 대비 1,165% 급증했고, 10월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인력 데이터 플랫폼 Pave의 분석에 따르면, 약 9,000개 고객사 중 1.24%가 FDE 직무를 신설했다. 2년 전만 해도 거의 없던 직무다.

오픈AI는 2025년 7월 공식적으로 FDE 팀을 출범시켰고, 현재 3개 대륙 8개 도시에 10명 이상의 FDE를 운영 중이다. 램프는 약 15명의 FDE를 팟 단위로 조직해 운영한다. AI 스타트업 린디(Lindy), 산업 AI 기업 마타(Matta), 로보틱스 스타트업 게코 로보틱스(Gecko Robotics) 등도 FDE 채용에 적극적이다. FDE 평균 연봉은 17만 3,816달러로, AI 에이전트 경험(35%)과 LLM 경험(31%)이 가장 많이 요구되는 기술이다.

왜 갑자기 모두가 팔란티어 모델을 따라 하려는 걸까? a16z는 이를 ‘AI 역량’과 ‘AI 배포’ 사이의 격차로 설명한다. ChatGPT는 데모에서는 인상적이지만, 실제로 기업의 법률 계약서를 처리하고 CRM과 연동하며 산업별 규정을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과거 10년간 지배했던 PLG(Product-Led Growth) 모델은 복잡한 제품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기업 고객들은 AI 도구를 ‘사고 싶어’ 하지만 ‘설정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다.

a16z의 핵심 경고: 플랫폼이냐, 컨설팅이냐

하지만 a16z는 단순히 팔란티어를 따라 하는 것의 위험성을 강력히 경고한다. 마크 안드러스코는 “많은 스타트업이 FDE를 고용하지만, 그 밑에 재사용 가능한 플랫폼이 없다면 그건 확장 가능한 소프트웨어 비즈니스가 아니라 서비스 비즈니스”라고 지적한다.

팔란티어의 진짜 차별점은 FDE가 아니다. 그 아래에 강력한 통합 플랫폼이 있다는 점이다. 팔란티어의 제품들은 느슨한 컴포넌트 모음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 운영 체제처럼 작동한다. FDE들이 고객사에서 구축한 워크플로우는 플랫폼의 ‘재사용 가능한 프리미티브(primitives)’로 환원된다. 이것이 플랫폼을 더 강력하게 만들고, 결국 고객이 FDE 없이도 스스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a16z가 제시하는 잘못된 ‘팔란티어화’의 징후는 명확하다. 구독 대비 서비스 비율이 개선되지 않고, ARR당 엔지니어링 비용이 감소하지 않으며, 확장 기반 순유지율이 플랫폼 레버리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컨설팅 비즈니스에 가깝다. 이런 비즈니스는 마진이 제한되고 장기적 방어력이 없다.

올바른 ‘팔란티어화’의 조건

그렇다면 스타트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a16z는 핵심 질문을 던진다. “우리 카테고리의 AI 도입 격차를 메우기 위해 필요한 팔란티어식 포워드 배포의 최소량은 얼마이며, 이를 얼마나 빠르게 진정한 플랫폼 비즈니스로 전환할 수 있는가?”

성공적인 ‘팔란티어화’를 위해서는 명확한 전환 경로가 필요하다. FDE는 초기 고객 10~30명의 도입을 가속화하는 임시 수단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다음이 일어나야 한다. 첫째, FDE가 발견한 패턴을 플랫폼의 재사용 가능한 기능으로 만든다. 둘째, 통합된 데이터 모델과 워크플로우 추상화를 구축한다. 셋째, 고객이 점진적으로 셀프서비스로 전환할 수 있게 만든다.

재무 지표로 추적해야 할 것들도 분명하다. 구독 대비 서비스 믹스가 개선되고 있는가? ARR당 엔지니어링 비용이 감소하고 있는가? 확장 기반 순유지율이 플랫폼 레버리지를 확인해주는가? 이런 지표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확장 가능한 소프트웨어 비즈니스가 아니라 마진이 제한된 서비스 비즈니스다.

a16z는 또한 현실적인 조언도 제공한다. 만약 어떤 주제가 20개 이상의 도구 호출이 필요할 정도로 복잡하다면, 고객에게 처음부터 리서치 기능을 추천하는 것이 낫다. 팔란티어처럼 되려면, 팔란티어가 20년간 해온 가장 어려운 부분, 즉 진정한 플랫폼 구축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도 ‘팔란티어 열풍’ 중

팔란티어는 한국 시장도 적극 공략하고 있다. 2025년 3월 KT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한국 기업 최초로 ‘월드와이드 파트너 에코시스템’에 합류했다. 10월 14일에는 알렉스 카프(Alex Karp) CEO가 직접 서울을 방문해 KT 김영섭 대표와 만났고, 대한항공, 메리츠금융, LS일렉트릭, POSCO홀딩스, HD현대 임원들과 비공개 일대일 미팅을 가졌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날 오후 서울 성수동에 팔란티어가 이틀간 팝업스토어를 열었다는 점이다. 회사 역사상 첫 오프라인 팝업스토어였다. 팔란티어는 2025년 6월 온라인 굿즈 스토어를 재런칭했는데, 한국 고객이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국제 시장으로 부상했다. 테슬라, 엔비디아와 함께 ‘서학개미(해외 주식 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종목 중 하나인 팔란티어는 한국에서 테크 기업을 넘어 일종의 컬트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의 새로운 패러다임

팔란티어 현상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의 근본적 변화를 반영한다. 가트너는 2027년까지 조직들이 범용 LLM보다 작업별 특화 소형 언어 모델(SLM)을 3배 더 많이 사용할 것으로 예측한다. 2027년에는 엔터프라이즈 AI 구현의 3분의 1이 여러 기술을 가진 자율 에이전트를 결합해 복잡한 작업을 관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a16z의 경고는 명확하다. FDE 채용 공고가 수백 퍼센트 증가하고 있지만, 성공하는 팀은 이를 영구적 수익 엔진이 아닌 임시 도입 가속화 수단으로 활용한다. 진짜 가치는 그 과정에서 구축되는 재사용 가능한 플랫폼, 통합된 데이터 모델, 워크플로우 추상화에 있다.

팔란티어의 주가 랠리는 투기가 아니라 실제 기업 고객들의 절박한 수요를 반영한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스타트업이 이 모델의 어려운 부분, 즉 진정한 플랫폼 구축을 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2026년은 AI 스타트업들에게 ‘개념 증명’에서 ‘프로덕션 확장’으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플랫폼 없는 팔란티어화는 결국 확장성 없는 컨설팅 서비스로 귀결될 것이라는 a16z의 경고를, 스타트업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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