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에너지의 아킬레스건 ‘간헐성’ 잡는다 — 에너베뉴, NASA 기술로 3억 달러 투자유치


태양광과 풍력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에너지원이지만, 결정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해가 지면 발전이 멈추고, 바람이 안 불면 터빈이 돌지 않는다. 며칠씩 흐리거나 무풍 상태가 지속되면 단기 배터리로는 손을 쓸 수 없다. 재생에너지가 전력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수록 이 간헐성 문제는 더 이상 기술적 과제가 아니라 인프라의 문제가 된다.

EnerVenure henning rath ceo - 와우테일

여기에 AI 데이터센터의 폭발적 전력 수요가 더해졌다. 24시간 365일 안정적인 전력이 필수인 데이터센터를 재생에너지만으로 운영하려면, 수십 시간~며칠치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배터리가 필요하다. 현재 전력망의 주류인 리튬이온 배터리는 이 역할에 맞지 않는다. 경제성 있는 저장 시간이 4~8시간에 그치는 데다, 수천 번 충방전 후 성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열폭주(thermal runaway) 화재 위험도 상존한다. 2025년 초 캘리포니아 모스랜딩 발전소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가 발생해 태평양 연안 고속도로가 폐쇄되고 인근 지역이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도 이 맥락에서다.

이른바 장기 에너지 저장(LDES, Long-Duration Energy Storage)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LDES의 본질은 단순한 정전 대비가 아니다. 재생에너지를 석탄·가스처럼 믿을 수 있는 전력원으로 만들어주는 기반 인프라다. 과잉 발전 시 전력을 흡수하고 부족 시 방출하는 그리드 밸런싱, 다일 갭(multi-day gap) 해소,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 전력 공급까지 — 기존에 석탄·가스 발전소가 맡아오던 역할을 탄소 없이 대체하는 기술이다.

캘리포니아 프레몬트에 본사를 둔 에너베뉴(EnerVenue)는 이 시장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NASA가 1980년대 개발해 우주 임무에 활용한 니켈-수소 배터리 기술을 그리드 규모에 맞게 재설계해 상업화한 회사다.

창업자 이 추이(Yi Cui)는 스탠퍼드대학교 소재과학 및 공학과 교수다. 중국과학기술대학교에서 화학 학사를, 하버드대학교에서 화학 박사를 취득한 뒤 UC 버클리 밀러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스탠퍼드 교수진에 합류했다. 2017년 EEnotech를 창업해 나노기술 기반 에너지·환경 솔루션을 개발했고, 2020년 그 스핀오프로 에너베뉴를 설립했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이 추이의 2007년 배터리 논문을 읽고 직접 찾아와 논의했을 만큼, 에너지 저장 분야에서 그의 명성은 일찍부터 업계에서 인정받았다.

에너베뉴는 3월 31일 풀비전캐피탈(Full Vision Capital) 주도로 시리즈B 익스텐션 3억 달러 조달을 마무리했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헤닝 라트(Henning Rath)를 신임 글로벌 CEO로 선임했다.

이번 라운드는 홍콩 억만장자 피터 리 카킷(Peter Lee Ka-kit)의 패밀리 오피스인 풀비전캐피탈이 주도했다. 크런치베이스 기준 누적 투자액은 4억 4500만 달러이며, 중국 매체 36커(36Kr) 보도를 근거로 한 일부 분석에서는 총 3개 라운드 누적 조달액이 8억 달러를 넘는다고 본다. 기존 전략적 투자자로는 아람코 벤처스(Aramco Ventures), NEOM 투자 펀드, SAIC 캐피탈, IDG 캐피탈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신임 CEO 라트는 독일 최대 주거용 재생에너지 공급사이자 유럽 최고 수준의 그린테크 유니콘인 엔팔(Enpal)에서 매니징 디렉터 겸 최고공급망책임자(CSCO)를 역임했다. 엔팔 이전에는 전동 킥보드 스타트업 서크(CIRC)를 공동 창업해 아시아 시장을 이끌었고, 이후 서크는 버드(Bird)에 인수됐다. 뮌스터응용과학대학교(UoAS Muenster)에서 산업공학 학사와 MBA를 취득했으며, 스탠퍼드와 하버드에서 추가 수학했다. 독일·호주·인도·중국 등 글로벌 시장 경험을 두루 갖춘 공급망·제조 전문가다.

에너베뉴의 제4세대 기술인 수성 금속 셀(AMC, Aqueous Metal Cell)은 하루 3회 충방전 기준 30년 이상, 즉 3만 사이클 이상의 설계 수명을 갖는다. 리튬을 전혀 쓰지 않으며, 수계 전해질 방식으로 리튬이온 배터리의 가연성 유기용매를 완전히 배제했다. 영하 40도에서 영상 50도까지 작동하며, 일반 리튬이온 대비 4~6배 높은 처리 용량을 제공한다는 것이 회사 측 주장이다. 에너지 밀도보다 내구성과 총소유비용(TCO)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23년 5월에는 UL1973 인증과 UL9540A 테스트를 통과하며 안전성을 공식 검증받았다.

주요 적용 분야는 전력 유틸리티, 재생에너지 단지, AI 데이터센터, 그리고 정전 허용이 불가능한 산업 시설이다. 현재 미국·중국·호주·EU에서 파일럿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2024년에는 에너지 기업 RWE가 파일럿 프로젝트에 에너베뉴 배터리를 채택했다. 타임(TIME)지는 에너베뉴를 2025년 미국 그린테크 기업 상위 10위, 전 세계 에너지 저장·유통 부문 2위에 선정했다.

이번 자금은 주로 제조 확장에 투입된다. 중국 장쑤성 창저우에 250MWh 규모의 대형 양산 라인을 구축하고 장기적으로 연간 1GWh 생산 체제를 갖추는 것이 목표다. 250MWh 라인 착공은 2026년 후반 예정이다. R&D는 실리콘밸리 캘리포니아 거점에서 차세대 수성 금속 셀 개발에 집중한다. 홍콩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본부와 소재 연구 혁신센터를 설립하고, 아시아·중동·유럽 시장 공략을 본격화한다. 홍콩 정부 산하 홍콩투자공사(HKIC)도 전략적 투자자로 합류했다.

비리튬 장기 ESS 경쟁사 동향

에너베뉴가 직접 경쟁하는 시장은 리튬이온 진영이 아니다. 리튬이온이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장기 저장 영역, 즉 LDES 시장이다.

폼에너지(Form Energy)는 철의 산화환원 반응, 즉 ‘녹슬기’를 역으로 활용하는 철-공기 배터리로 최장 100시간 방전이 가능한 시스템을 개발했다. 빌 게이츠의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 GE 버노바 등으로부터 2024년 10월 시리즈F 4억 500만 달러를 조달해 누적 12억 달러 이상을 확보했다. 2026년 2월에는 구글이 미네소타주 데이터센터에 300MW 규모 배터리를 약 10억 달러에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웨스트버지니아주 공장에서 이미 상업 생산을 시작해 엑셀에너지(Xcel Energy), 조지아파워(Georgia Power) 등 주요 유틸리티에 납품 중이다.

인비니티(Invinity Energy Systems)는 바나듐 흐름 배터리(VFB) 전문 제조사다. 전해질이 탱크에서 순환하는 방식으로 사이클 한계가 사실상 없고 30년 수명을 내세운다. 영국 정부의 LDES ‘캡앤플로어’ 지원 체계 입찰에서 9개 개발사가 인비니티의 400MWh급 배터리를 선택했다. 2024년 5월 국가자산펀드(National Wealth Fund) 포함 기관 투자사들로부터 5740만 파운드를 조달했다.

ESS Inc.는 철·소금·물을 기반으로 한 수계 산화환원 흐름 배터리를 개발하며,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벤처스와 소프트뱅크 등이 투자했다.

세 회사의 기술은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리튬을 쓰지 않으며, 수십 시간~며칠 단위 방전이 가능하고, 수만 사이클의 수명을 내세운다. 재생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되고 AI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 시장이 빠르게 현실화되고 있다. 에너베뉴는 우주 검증 기술에 중국 최대 배터리 제조 클러스터를 결합하는 독특한 포지셔닝으로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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