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봇’은 옛말, AI 시대 스타트업은 ‘리파운딩’한다


실리콘밸리에서 ‘피봇(pivot)’은 묘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다. 방향 전환이라는 중립적 의미지만, 어딘가 “처음 계획이 틀렸다”는 고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최근 AI 물결 속에서 사업 모델을 전면 재편하는 기업들이 피봇 대신 새로운 표현을 꺼내들었다. 바로 ‘리파운딩(Refounding)’, 다시 창업한다는 뜻이다.

pivot refounding - 와우테일

뉴욕타임스는 최근 에어테이블, 핸드셰이크, 오픈도어 등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잇따라 리파운딩을 선언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단순히 AI 기능을 얹는 수준이 아니라, 제품 구조부터 조직 문화, 가격 정책까지 회사의 근본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한다는 것이다.

노코드 앱 플랫폼 에어테이블(Airtable)이 이 흐름의 선두에 섰다. 공동창업자 겸 CEO 호위 리우는 지난 6월 “기존 플랫폼에 AI를 덧붙이는 대신, 이것을 회사의 리파운딩 순간으로 삼았다”고 발표했다. 그는 ‘리런치’나 ‘트랜스포메이션’ 같은 표현도 검토했지만 결국 ‘창업의 언어’를 택했다고 밝혔다. “지금 내리는 결정이 회사의 다음 10년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봇은 뭔가 잘못된 뒤 방향을 바꾸는 느낌이지만, 리파운딩은 다르다.”

채용 플랫폼 핸드셰이크(Handshake)도 10월 리파운딩 대열에 합류했다. CEO 개럿 로드는 AI 연구소에 박사급 전문가 데이터를 공급하는 새 사업 모델을 공개하며 “이건 세컨드 액트가 아니라, 10년 전 시작한 미션의 다음 도약”이라고 선언했다. 핸드셰이크는 이와 함께 미국 직원의 15%(약 100명)를 감원하고 주 5일 사무실 출근을 의무화했다.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캐서린 켈리는 “기존 조직에 스타트업 문화를 다시 불어넣는 것”이 핵심이라며, 직원들에게 초창기 스타트업 수준의 속도와 몰입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동산 테크 기업 오픈도어(Opendoor)도 지난 11월 같은 선언을 했다. 쇼피파이(Shopify) COO 출신의 새 CEO 카즈 네자티안은 실적 발표에서 “오픈도어를 소프트웨어와 AI 회사로 리파운딩하고 있다”고 밝혔다. 취임 한 달 만에 사무실 복귀를 추진하고, 외부 컨설턴트 의존을 끊고, 12개 이상의 AI 기반 기능을 출시했다. 그는 “매니저 모드를 버리고 파운더 모드로 돌아갔다. 이것이 오픈도어 2.0″이라고 강조했다.

예일대 경영대학원에서 이 현상을 연구해온 존 이와타는 “리파운딩은 회사가 과거에 잘 작동했던 근본 요소를 ‘재해석’하는 작업”이라고 분석했다. 전 IBM 수석부사장 출신인 그는 200건 이상의 CEO 인터뷰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에 따르면 많은 기업이 합리적인 결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핵심 정체성을 잃어버리는데, 리파운딩은 이를 되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와타는 “AI가 수많은 CEO들에게 ‘우리가 정말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리스크도 만만치 않다. 핸드셰이크와 오픈도어 모두 리파운딩과 함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급격한 변화는 조직 내 혼란을 부르고, 고객도 이탈할 수 있다. 켈리 CMO는 “리파운딩을 조직 구성원들이 진심으로 믿게 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고 경고했다.

CB인사이츠(CB Insights)에 따르면 스타트업의 38%가 자금 고갈로, 35%가 시장 수요 부족으로 실패한다. 리파운딩이 시장 수요를 재정립하고 비용 구조를 정비할 수 있다면, 투자자들의 관심을 다시 끌어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피봇이 “계획이 틀렸으니 방향을 바꾸자”는 메시지라면, 리파운딩은 “창업 때의 열정으로 AI 시대에 맞게 회사를 다시 세우자”는 선언이다. 회사는 한 번만 창업할 수 있다는 통념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AI가 모든 산업의 규칙을 다시 쓰고 있는 지금, 리파운딩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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