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AI 스타트업 투자의 새로운 유행, ‘헤드라인 밸류 vs 블렌디드 밸류’의 비밀


리졸브AI아루(Aaru) 같은 AI 스타트업들이 최근 “10억 달러 밸류”를 달성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화려한 숫자 뒤에는 복잡한 투자 구조가 숨어 있다. 바로 ‘다단계 밸류(multi-tranche valuation)’ 또는 ‘멀티 티어(multi-tier) 투자’라 불리는 새로운 방식이다. 같은 투자 라운드 안에서 투자자마다 다른 가격에 지분을 매입하는 이 구조가 AI 스타트업들 사이에서 왜 유행하고 있을까.

Trends Headline Value vs Blended Value - 와우테일

원래 투자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한 투자 라운드에서는 모든 투자자가 똑같은 밸류로 지분을 산다. 시리즈A에서 회사 밸류가 1억 달러로 정해지면, 그 라운드에 참여하는 모든 투자자가 1억 달러 밸류 기준으로 지분을 사들이는 식이다. 수십 년간 벤처캐피털 업계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다단계 밸류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시리즈A 라운드 안에서도 어떤 투자자는 10억 달러 밸류로 지분을 매입하고, 다른 투자자들은 7억 달러나 8억 달러 같은 더 낮은 밸류로 투자한다. 헤드라인은 “10억 달러 밸류 달성”이지만, 실제로 모든 투자금을 합쳐서 계산한 ‘블렌디드 밸류(혼합 밸류)’는 10억 달러보다 훨씬 낮다.

테크크런치의 마리나 템킨 기자는 “다단계 밸류는 벤처캐피털에서 흔치 않은 방식이지만, 투자자들은 현재 시장에서 인기 있는 AI 스타트업들 사이에서 점점 더 일반화되고 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리졸브AI와 아루의 실제 투자 구조

리졸브AI(Resolve AI)의 경우를 보자. 테크크런치가 거래 사정을 아는 3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라이트스피드 벤처 파트너스(Lightspeed Venture Partners) 주도로 진행된 시리즈A의 헤드라인 밸류는 10억 달러다. 하지만 실제 블렌디드 밸류는 이보다 낮다. 일부 투자자는 10억 달러 밸류로 지분을 샀지만, 대부분의 투자금은 더 낮은 가격에 들어갔다.

AI 시장 조사 스타트업 아루(Aaru)도 비슷하다. 지난 12월 레드포인트 벤처스(Redpoint Ventures) 주도로 시리즈A를 받았는데, 헤드라인 밸류는 10억 달러지만 블렌디드 밸류는 10억 달러 미만이다. 2024년 3월 설립된 지 불과 9개월 만에 유니콘 반열에 올랐다는 게 화제가 됐지만, 실제로는 모든 투자자가 10억 달러 밸류로 들어간 건 아니었다. 아루는 AI 에이전트로 인간 행동을 시뮬레이션하는 ‘합성 인구’를 만들어 즉각적인 시장 조사를 제공하는 회사다. 연간반복수익(ARR)은 아직 1,000만 달러도 안 되지만, 기술의 잠재력을 높이 산 투자자들이 몰렸다.

왜 이런 복잡한 구조가 생겨났나

이 독특한 투자 방식이 등장한 건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창업팀 입장을 보자. 당연히 높은 밸류를 원한다. 같은 금액을 투자받아도 밸류가 높으면 지분 희석이 적다. 게다가 “10억 달러 유니콘”이라는 타이틀은 인재 채용, 고객 유치, 언론 주목도에서 엄청난 무기가 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유니콘이냐 아니냐는 회사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여기서 전략적 투자자나 소액 투자자가 등장한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나 유명 엔젤 투자자들은 재무적 수익보다 관계가 중요할 때가 많다. 유망한 AI 스타트업과 연결고리를 만들고, 기술 동향을 파악하고, 필요하면 나중에 인수할 옵션을 갖는 게 목표다. 이들은 기꺼이 높은 밸류를 지불해서 창업팀의 요구를 들어준다. 어차피 작은 금액만 투자하니까 손실 위험도 제한적이다.

반면 라운드의 주요 투자자들은 다르다. 수천만 달러, 수억 달러를 투자하는 주요 VC들은 수익률을 계산해야 한다. 펀드 LP(출자자)들에게 수익을 돌려줘야 하니까. 이들은 회사의 잠재력을 믿지만, ARR 400만 달러인 회사에 10억 달러 밸류를 주긴 부담스럽다. 그래서 더 합리적인 가격, 예를 들어 7억~8억 달러 밸류로 지분을 확보한다.

결국 이 구조는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킨다. 창업팀은 원하는 10억 달러 헤드라인 밸류를 얻고, 전략적 투자자는 관계를 만들고, 주요 투자자들은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큰 지분을 확보한다. 윈윈이다.

AI 시장이 워낙 뜨겁다

이런 투자 구조가 가능한 건 AI 시장이 그만큼 과열됐기 때문이다. 2025년 미국에서만 49개 AI 스타트업이 1억 달러 이상 투자를 받았다. 테크크런치 집계다.

성장 속도도 미친 수준이다. AI 코딩 도구 커서(Cursor)는 올해만 두 차례 투자를 받아 밸류가 26억 달러에서 293억 달러로 11배 뛰었다. 오픈AI(OpenAI)는 2024년 10월 1,570억 달러에서 2025년 3월 3,000억 달러, 11월에는 5,000억 달러로 불과 1년 만에 3배 넘게 치솟았다. 포천지 분석에 따르면 “12개월 동안 오픈AI의 밸류는 매달 약 290억 달러씩, 하루 거의 10억 달러씩 증가했다.”

이런 시장에서는 투자자들이 좋은 딜에 들어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기회를 놓친다. 펠리시스 벤처스(Felicis Ventures)의 아이딘 센쿠트(Aydin Senkut) 설립자는 이런 연이은 투자를 “틀릴 비용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고속 시장의 신호”라고 설명했다.

2021년 버블에서 배운 교훈

사실 투자자들이 이렇게 신중한 구조를 만든 데는 2021년의 뼈아픈 기억도 있다. 2021년 벤처 시장은 완전히 과열됐다. 돈이 넘쳐나니까 많은 스타트업들이 터무니없이 높은 밸류로 투자를 받았다. 그러다 2022~2023년 시장이 급랭하면서 다운라운드(밸류가 떨어진 투자)를 하거나 자금난에 빠진 회사들이 줄줄이 나왔다.

얼터만즈 사가(Altman’s Saga)의 벤 브레이버만(Ben Braverman) 공동창업자는 “2021년 이후 지금까지 시장 양쪽에서 일어난 일은 ‘품질로의 도피’”라고 말했다. “VC들은 지난 사이클에서 깨달았다. ‘우리가 정말 신뢰하는 몇몇 회사에 자본의 대부분을 집중하자.’” 이제 투자자들은 더 까다로워졌지만, 정말 좋은 AI 스타트업에는 여전히 엄청난 돈이 몰린다. 다단계 구조는 이 두 가지, 즉 공격적 투자와 신중한 리스크 관리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그래도 위험은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투자 구조의 위험성도 지적한다.

첫 번째는 지분 구조가 복잡해진다는 것이다. 포천지는 “빠른 투자 라운드는 캡테이블(지분 구조표)을 빠르게 복잡하게 만들고 창업자의 지분이 희석된다”고 경고했다. 여러 밸류로 여러 투자자가 들어오면 누가 어떤 조건으로 얼마나 갖고 있는지 파악하기도 어렵다. 나중에 추가 투자받거나 회사를 팔 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두 번째는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것이다. 포천은 “아마도 가장 큰 위험은, 이렇게 과도하게 자금을 받은 스타트업들 중 일부가 통제할 수 없는 번율(burn rate)을 갖게 되고, 시장이 어려워지고 자본이 마르면 이를 되돌리지 못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해 너무 많은 돈이 들어오면 펑펑 쓰는 버릇이 생긴다. 직원도 막 뽑고, 마케팅도 과하게 하고, 사무실도 화려하게 꾸민다. 그러다 투자 시장이 얼어붙으면? 대규모 정리해고가 일어나거나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상장할 때 현실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IPO를 하면 공개 시장 투자자들이 회사를 다시 평가한다. 2025년 카임(Chime)이나 클라르나(Klarna) 같은 회사들은 IPO에서 2021년 최고점 대비 밸류가 큰 폭으로 떨어졌다. 사모 시장에서 부풀려진 밸류는 공모 시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면 직원들이 받은 스톡옵션 가치가 휴지조각이 되고, 사기가 떨어지고, 인재들이 떠난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은 낙관적이다

하지만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아더와이즈 펀드(Otherwise Fund)의 테렌스 로한(Terrence Rohan) 전무는 “특정 회사들에서 보고 있는 매출 성장은 전례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새로운 표현형의 스타트업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성과도 놀랍다. 바이브 코딩 스타트업 러버블(Lovable)은 3개월 만에 ARR 0에서 1,700만 달러로 성장했다. 대화형 AI 스타트업 데카곤(Decagon)은 첫 6개월 만에 7자릿수 ARR을 달성했다. 커서는 1년 만에 ARR 1억 달러를 찍었다. 이런 폭발적인 성장 앞에서는 10억 달러 밸류도 과하지 않다는 게 투자자들의 생각이다.

한국에 주는 교훈

이런 투자 구조 변화는 한국 투자 생태계에도 시사점을 준다.

첫째, AI 같은 빠르게 움직이는 분야에서는 유연해야 한다. 전통적인 투자 방식만 고집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 둘째, 헤드라인 밸류와 실제 조건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 “10억 달러 유니콘” 뉴스를 볼 때 실제로 모든 투자자가 그 가격에 들어간 건지, 아니면 일부만 그런 건지 따져봐야 한다. 셋째, 높은 밸류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탄탄한 비즈니스 모델이 훨씬 중요하다.

아벤티스 어드바이저스(Aventis Advisors)는 분석 보고서에서 “시간이 지나면 강력한 펀더멘털이 부풀려진 밸류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창업자들은 단기적인 과대광고를 쫓기보다는 지속 가능하고 고객 중심적인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AI 투자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크런치베이스에 따르면 2025년 3분기 글로벌 벤처 투자는 970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8% 증가했다. 4분기 연속 900억 달러를 넘겼다. 이 중 AI 관련 기업이 450억 달러로 전체의 46%를 차지했다. CB인사이츠 데이터로는 더 놀랍다. 2025년 AI 스타트업 투자가 2,023억 달러로 2024년(1,080억 달러)의 거의 2배 수준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극화가 심하다. 3분기에 5억 달러 이상 메가라운드가 전체 투자의 30% 이상을 차지했고, 단 18개 회사가 전체 투자의 3분의 1을 가져갔다. 크런치베이스는 “AI 벤처 투자 환경이 얼마나 상위 집중적이 됐는지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2025년 들어 평균 투자 규모는 4,930만 달러로 2024년 대비 86% 늘었다. 투자자들이 더 적은 회사에 더 큰 돈을 쓰고 있다.

3분기 최대 투자는 앤스로픽(Anthropic)의 130억 달러 시리즈F였다. 이 한 건이 3분기 전체 AI 투자의 29%를 차지했다. xAI가 53억 달러, 미스트랄AI(Mistral AI)가 20억 달러를 받았다. 오픈AI는 2025년 10월 500억 달러 밸류를 달성해 사상 최고가 밸류 비상장 기업이 됐다. 앤스로픽도 1,830억 달러로 4위에 올랐다. 이 두 회사만으로 유니콘 보드 전체 가치의 거의 10%를 차지한다.

투자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2024년의 ‘무조건 크고 빠르게’에서 2025년에는 ‘실제로 돈을 버는지’를 더 중시한다. CB인사이츠는 “투자자들은 AI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과 AI 개발의 높은 비용 모두를 보여주며, 모든 단계에서 더 큰 수표를 쓰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드 라운드 중간값이 2024년 250만 달러에서 2025년 340만 달러로 뛰었다. 초기 단계에서도 투자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규제도 신경 써야 한다. 미국과 EU에서 AI 규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스타트업들은 컴플라이언스 부담을 안게 됐다. 하지만 벤처캐피털들은 여전히 낙관적이다. 다만 더 까다로워졌다. 무작정 밸류만 높게 쳐주지 않고, 이 회사가 정말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 따진다. 다단계 밸류 구조는 이런 신중함과 공격적 투자 사이의 절충안이다. 앞으로 이 트렌드가 AI를 넘어 바이오테크, 핀테크 같은 다른 핫한 분야로도 번질지 지켜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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