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접시 크기 칩”으로 나스닥 문 두드리는 세레브라스, IPO 신청서 제출


10년 전, 다섯 명의 반도체 엔지니어가 AI 연산의 병목을 근본부터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GPU 수천 개를 연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웨이퍼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칩으로 만들면 어떨까. 당시로선 황당하게 들렸던 이 발상이 지금은 오픈AI(OpenAI)의 핵심 추론 인프라를 떠받치고 있다.

celebras wse - 와우테일

AI 칩 스타트업 세레브라스 시스템즈(Cerebras Systems)가 2026년 4월 17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기업공개(IPO) 신청서(S-1)를 제출했다. 나스닥 티커는 ‘CBRS’다. 세레브라스가 IPO를 공식 추진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24년 9월 처음 신청했다가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안보 심사 때문에 철회한 후, 약 1년 반 만에 재도전에 나선 것이다.

CFIUS는 외국인이 미국 기업에 투자할 때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지 심사하는 미국 정부 기구다. 핵심 기술을 보유한 첨단 스타트업이 IPO를 앞두고 외국 투자자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CFIUS 심사를 통과해야 상장이 가능하다.

웨이퍼 전체를 하나의 칩으로

세레브라스는 2016년 앤드류 펠드먼(Andrew Feldman), 게리 라우터백(Gary Lauterbach), 마이클 제임스(Michael James), 숀 라이(Sean Lie), 장 필리프 프리커(Jean-Philippe Fricker)가 공동 창업했다. 창업팀은 이전에 에너지 효율형 서버 스타트업 씨마이크로(SeaMicro)를 함께 세워 2012년 AMD에 3억 3,400만 달러에 매각한 경험이 있다. 펠드먼 CEO는 AMD 기업부사장을 거친 반도체 업계 베테랑이다.

창업 아이디어는 간단했지만 실현은 지독히도 어려웠다. AI 연산은 ‘통신 병목(communication-bound)’ 문제다. GPU 클러스터에서는 수천 개 칩 사이를 데이터가 끊임없이 오가고, 이 과정에서 속도가 죽는다. 세레브라스의 답은 아예 웨이퍼 하나를 통째로 칩으로 쓰는 ‘웨이퍼 스케일 통합(wafer-scale integration)’이었다. 칩 간 통신을 온칩 통신으로 대체하면 지연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현재 3세대 모델인 웨이퍼 스케일 엔진(WSE-3)은 4조 개의 트랜지스터와 90만 개의 AI 코어를 단일 기판에 집약했다. 엔비디아 B200보다 58배 큰 면적에, 메모리 대역폭은 B200 패키지 대비 2,625배에 달한다고 회사 측은 밝힌다. 주력 오픈소스 모델 기준 추론 속도가 GPU 솔루션 대비 최대 15배 빠르며, 일부 특수 워크로드에서는 1,000배 이상 차이 난다는 것이 세레브라스의 주장이다.

S-1에는 창업자들의 회고가 담겼다. “우리는 오랫동안 실패했다. 하지만 두려움 없는 엔지니어링과 끈질긴 추진력을 믿는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두 번의 IPO: 1차 실패, 그리고 재도전

세레브라스의 첫 IPO 시도는 2024년 9월이었다. 당시 신청서에는 아랍에미리트(UAE) AI 기업 G42가 2023년 매출의 87%, 2024년 상반기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CFIUS가 G42의 지분 투자를 문제 삼아 안보 심사에 착수했다. G42를 통해 세레브라스 기술이 중국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공백기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CFIUS는 2025년 3월 31일 심사를 완료했고, G42의 지분은 의결권 없는 주식으로 전환됐다. 새 S-1에서는 G42가 투자자 목록에서 완전히 빠졌다. 그리고 이 기간 사이 오픈AI, AWS와의 대형 계약이 잇달아 체결되면서 회사의 투자 스토리가 완전히 달라졌다.

20억 달러 오픈AI 계약이 바꾼 모든 것

이번 IPO의 핵심 서사는 오픈AI와의 파트너십이다. 세레브라스는 2026년 1월 오픈AI와 2028년까지 750메가와트 규모의 컴퓨팅 파워를 공급하는 다년 계약을 발표했다. 계약 규모는 20억 달러 이상으로, 비(非)엔비디아 AI 인프라 계약 사상 최대 규모다. 오픈AI는 여기에 더해 2030년까지 1.25기가와트를 추가 구매할 수 있는 옵션도 확보했다.

자금 구조도 독특하다. 오픈AI는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연 6% 이자율로 세레브라스에 10억 달러를 빌려줬다. 세레브라스는 이 대출을 현금, 제품, 서비스 어느 방식으로든 상환할 수 있다. 오픈AI는 또 세레브라스 비의결권 주식 3,344만여 주를 살 수 있는 워런트(주식매입청구권)를 받았는데, 이 권리는 오픈AI가 세레브라스 컴퓨팅 2기가와트를 실제로 구매해야 전부 행사할 수 있다.

Axios에 따르면 이 워런트는 세레브라스 지분의 최대 10%에 해당할 수 있으며, 세레브라스가 월평균 기업가치 400억 달러를 한 달간 유지하면 추가 지분도 확정된다. 오픈AI의 코덱스-스파크(Codex-Spark) 사용자는 현재 세레브라스 인프라 위에서 아이디어를 즉시 작동하는 코드로 바꾸고 있다고 S-1은 설명한다. 오픈AI CEO 샘 올트먼(Sam Altman)이 세레브라스의 초기 개인 투자자라는 사실도 S-1에 공개됐다. 두 회사는 2017년부터 협력 가능성을 논의해왔다.

2026년 3월 13일에는 아마존웹서비스(AWS)와 협력을 공식 발표했다. AWS가 세레브라스 CS-3 시스템을 자체 데이터센터에 직접 도입하는 첫 번째 하이퍼스케일러가 된다는 내용이다. 독특한 점은 AWS 자체 AI 칩 트레이니엄(Trainium)과 세레브라스 WSE를 역할 분담시키는 ‘분리형 추론(disaggregated inference)’ 구조다. 트레이니엄이 사용자 프롬프트 처리를 맡고, WSE가 답변 생성을 전담해 같은 하드웨어 규모 대비 5배 더 많은 고속 토큰을 처리할 수 있다고 두 회사는 밝혔다. 아마존 베드록(Amazon Bedrock)을 통해 올해 중으로 서비스가 시작될 예정이다.

IBM 왓슨엑스, 버셀(Vercel), 오픈라우터(OpenRouter), 허깅페이스(Hugging Face) 등도 세레브라스 추론 서비스를 마켓플레이스를 통해 제공 중이다.

5억 1,000만 달러 매출, 흑자 전환

재무 성과도 이 두 파트너십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2022년 2,460만 달러이던 매출은 2023년 7,870만 달러, 2024년 2억 9,030만 달러, 2025년 5억 1,000만 달러로 4년 만에 20배 이상 성장했다. 2025년 전년 대비 매출 증가율은 76%다.

손익도 극적으로 달라졌다. 2024년 4억 8,160만 달러 순손실을 낸 회사가 2025년에는 2억 3,780만 달러 순이익(GAAP 기준)을 기록했다. 다만 주식보상비용 등 일회성 항목을 제외한 비(非)GAAP 기준으로는 여전히 7,570만 달러 순손실이다. 어느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흑자와 적자가 엇갈린다.

눈길을 끄는 것은 향후 인식 예정인 계약 잔고 규모다. 2025년 말 기준 246억 달러로, 2025년 연 매출의 48배에 달한다. 이 중 15%를 2026~2027년에 수익으로 인식할 예정이다. 2025년 기준 상위 10개 고객은 첫 구매 후 12개월 내 지출을 평균 80% 늘렸다.

매출 집중도는 여전히 최대 과제

투자 리스크로는 고객 집중도가 첫손에 꼽힌다. 2025년 매출의 62%는 UAE 공공 연구기관인 모하메드 빈 자예드 인공지능대학(MBZUAI)에서 나왔고, G42가 24%를 차지했다. UAE 두 기관이 합산 86%다. G42 단독 87%이던 2024년 상반기에서 사실상 구조가 그대로라는 지적도 있다. 오픈AI 파트너십이 의존 구조를 미국 쪽으로 이동시키는 신호이긴 하지만, 오픈AI가 계약 이행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계약 전부 또는 일부를 해지할 수 있는 조항도 S-1에 명기됐다. TSMC 단일 파운드리 의존, 엔비디아 CUDA 대비 제한적인 소프트웨어 생태계도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IPO 규모와 밸류에이션

세레브라스는 2026년 2월 타이거 글로벌(Tiger Global) 주도, AMD·피델리티 참여로 10억 달러 시리즈H를 마감하며 기업가치 23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이번 상장에서는 30억 달러 이상을 모집하고, 기업가치는 350억 달러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The Information 등 복수 매체가 보도했다. 직전 라운드 230억 달러에 약 52% 프리미엄을 얹은 수준이다. 세컨더리 마켓에서는 현재 주당 102107달러에 거래돼 완전 희석 기준 260억280억 달러 수준으로, 350억 달러 목표와는 아직 격차가 있다.

2025년 매출 5억 1,000만 달러 대비 약 70배의 주가매출배수를 적용하는 셈으로, 엔비디아(약 25배)에 비해 상당히 공격적인 숫자다. 계약 잔고 246억 달러가 이를 뒷받침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만큼 완벽한 실행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S-1에서는 펠드먼 CEO와 CTO 숀 라이가 향후 9년 안에 기업가치가 750억·1,500억·2,500억 달러에 도달하면 추가 주식 보상을 받는 조건도 공개됐다. 상장 시점은 5월 중순으로 거론된다.

상장 주관사는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가 맡고, 씨티그룹, 바클레이즈, UBS가 공동 주관사로 참여한다.

“엔비디아 빠른 추론 고객 뺏어왔다”

S-1의 기조는 명확하다. 빠른 추론이 AI의 다음 전장이라는 것이다. 챗GPT 이후 추론 중 계산을 추가해 정확도를 높이는 방식이 주류가 됐다. 더 많이 계산할수록 토큰 소비가 늘고, 토큰을 빠르게 생성할수록 사용자 경험이 올라간다. 브로드밴드가 인터넷을 정적 페이지에서 실시간 서비스로 바꾼 것처럼, 빠른 AI가 산업 전반을 바꿀 것이라는 논리다.

펠드먼 CEO는 WSJ 인터뷰에서 “오픈AI의 빠른 추론 사업을 엔비디아로부터 뺏어왔다”고 직접 밝혔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AI 훈련·추론 인프라 시장은 2025년 2,510억 달러에서 2029년 6,720억 달러로 연평균 28% 성장이 전망되며, 추론 시장은 훈련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분석됐다.

AI 반도체 시장의 지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 여기를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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